대구신세계갤러리, 이기성展
대구신세계갤러리, 이기성展
  • 황인옥
  • 승인 2021.06.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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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가루 물감 삼아 선 그어 산화
굵은 선·쌓은 선 등 변주 다양
“철, 가공되지 않은 원형 자체
선, 내면 드러내는 기본 단위”
이기성작-Kalpa연작
이기성 작 ‘Kalpa‘ 연작.

캔버스 위에 일정 양의 철가루를 붓고 손이나 나무막대로 쭉 그으면, 선이 캔버스 위에서 강한 존재감으로 드러난다. 붉은 빛을 띤 갈색 철가루는 그 자체로도 강렬하지만, 뭉쳤을 경우 아우라를 당할 재료가 없다. 말 그대로 절대강자가 된다.

하지만 철가루가 자체 발광체가 되는 순간은 여기까지다. 이후 작가의 응집된 터치의 흐름에 따라 철가루는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가없는 고요로 침잠하는 사유의 장이 되기도 한다. 철가루로 추상유희를 즐기는 이기성 작가의 ‘겁(劫·Kalpa)’ 연작이다. 대구신세계갤러리 ‘추상유희’전에 겁 연작들이 대거 출품됐다.

이기성의 ‘겁’ 연작에는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나 재료인 붓이나 물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철가루를 물감 대용으로, 손이나 나무막대를 붓 대신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모두 가공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재료나 도구들이다. 캔버스마저 가공되지 않은 면 생지를 사용한다.

‘겁’ 연작은 3년 전 그가 갤러리 비선재에 전속되면서 시작됐다. 완성도를 높여 발표한 것은 2019년 즈음이다. 작품은 철가루를 캔버스에 올리고 손이나 나뭇조각으로 일필휘지의 기운으로 긋고, 약간의 산화 기간을 거친 후에 고착액을 뿌려 완성한다. 고착액을 뿌리는 과정은 시간차를 두고 3~4번 더 진행된다. 산화 횟수를 높을수록 표면은 더욱 거칠어진다.

철가루로 표현된 선(線)이 중심적인 형상으로 자리를 잡지만, 여백도 그에 못지않은 지분을 확보한다. 코팅으로 가공되지 않은 생지를 사용하는 까닭에 철가루 위에 고착액을 뿌리면 고착액에 흡수된 철가루가 캔버스 표면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고, 스며든 지점은 선과 여백의 경계역할을 하게 된다. 선과 갈변(褐變)된 경계, 그리고 여백은 의도적으로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작업을 한 듯이 그 자체로 혼연일체가 된다. 하지만 갈변은 어디까지나 우연성이 준 효과다.

“선이나 여백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가 더 중요하다고 선후관계를 맺기 어려우며,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분량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겁’ 연작은 정신의 산물인 사유의 결정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추상이다. 작품은 최소한으로 가공된 재료와 최소한의 몸짓, 즉 자연상태를 유지하면서 제작된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추구하는 태도는 그의 주제의식과 연결된다. 그는 ‘겁’ 연작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작가에게 선이나 철가루는 “가공되지 이전의 원형질”에 해당되며, 존재의 본질이라는 정신성을 녹여내기에 안성맞춤인 재료다.

철가루는 재료의 한계를 두지 않는 작가의 성향 속에서 만난 물성이다. 10여년 전에는 첼로나 바이올린 등의 악기에 철가루를 뿌린 후 부식시키며 ‘소멸’에 대해 ‘환기’했다. 이후 캔버스 앞면에 철가루를 올린 후에 뒷면의 자석으로 표현한 ‘존재로부터-그리기(Within Being-Draw)’ 연작을 발표했다. 이 연작에서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사람을 왜곡하는 사회현상을 다뤘다.

마블링이나 철가루, 자석 등의 재료나 회화, 반입체, 설치 등 매체의 한계를 두지 않았지만, 작가가 변함없이 고수하는 지점은 있다. 바로 ‘선(線)’이다. 그는 다양한 실험적인 방식으로 선의 본질을 찾아간다.

이번 대구신세계갤러리 전시에 걸린 ‘겁’ 연작에는 선의 변주가 보다 다채롭다. 손으로 표현한 일필휘지의 기운생동하는 선(線)에서부터, 굵은 나무막대로 구축적으로 쌓아올린 면을 방불케 하는 굵은 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몇 차례에 걸쳐 구축된 선들은 도심 빌딩숲이나 거대한 바위산 같기도 하다. 산화의 강도에 따라 극도로 정제되거나 극도로 정제되지 않거나, 대기의 기운은 양 극단을 달리기도 한다.

작가는 “선(線)이 다 한다”고 했다. “선(線) 하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선을 그은 사람의 인품이나 지적상태, 취향 심지어 성격까지 다 드러난다. 선(線)이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선(線)은 나를 표현하고 나의 본질을 찾아가는 매개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053-661-150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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