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이야기] 대나무, 의리·절개…우린 저 ‘마디’의 강인함을 닮을 수 있을까
[박승온의 민화이야기] 대나무, 의리·절개…우린 저 ‘마디’의 강인함을 닮을 수 있을까
  • 윤덕우
  • 승인 2021.06.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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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묵죽화 대표 화가 이정
담묵·농묵 조절로 공간감 강조
줄기 지름·잎 크기 모자람 없어
역동감 위해 줄기 일부는 희게
특유의 강인한 분위기 잘 살려
‘이것’과 함께면 달라지는 의미
화병은 편안함, 매화는 장수
대나무만 그린 묵죽화와 달리
민화에선 다양한 소재와 병행
계절이 여름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여행을 하기에 그만인 듯하다. 초여름의 주말 오래전부터 가보기로 한 경주의 조용한 암자를 방문하였다. 초행길에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지를 찾는 와중에 멀리 보이는 대나무 숲을 보며 저곳에 암자가 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대나무 숲에 일렁이는 바람은 주윤발의 무협 영화 와호장룡의 한 장면이 떠올리게 했다.

와호장룡에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대나무 숲의 대결’이 펼쳐진다. 경공술의 초절정 고수들인 리무바이(주윤발)와 교룡(장쯔이)은 대나무 숲까지 구질구질하게 뛰어가거나 걸어가지 않고 훨훨 새처럼 날아간다. 대나무 줄기 끝에 서서 칼을 들고 대치되는 장면은 대숲의 잎들이 흔들리고 부딪혀 내는 음향과 푸른 하늘과 연한 초록색의 대나무 숲...

과장과 거짓말도 도를 넘으면 황당하기도 하고 김새기 마련이지만, 이 장면은 오히려 환상적이었다. 모든 극단(極端)에는 경계가 사라지고 일치한다고 하듯, 초절정 고수들의 그 무시무시한 칼싸움에 휘청이며 춤을 추는 대나무의 곡선은 영화의 한 장면을 평온하고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자그마한 암자에서 잊고 있던 차(茶)의 향기로 대나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리라 마음 먹었다.

대나무는 사군자 중 하나로 매란국죽(梅蘭菊竹) 네 가지 식물이 한꺼번에 사군자(四君子)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 때부터지만, 사실 이들이 사랑을 받은 것은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군자는 일찍부터 그림의 주요한 소재로 쓰이면서 충성과 절개, 지조와 같은 정신적 가치를 상징해왔다.

기본적으로 사군자가 매란국죽의 순서를 갖게 된 것은 사군자의 상징성에 군자다운 삶이 일 년 내내 지속 되라는 사계절의 의미까지 확장되면서 매화는 이른 봄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고, 난초는 깊고 은은한 향기가 단아하며, 국화는 찬 서리를 마다않고 늦게까지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이 그대로라는 점에서 이런 순서가 생겼다. 또한, 매화는 인자함, 국화는 의로움, 난초는 예, 대나무는 슬기로움을 상징한다.

그림 속의 대나무는 겨울의 푸르름으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지만. 여름의 대나무는 싱싱한 초록색과 죽순에서 올라오는 연두색의 새싹이 지금이 그들의 전성기인 듯 씩씩해 보인다.

모든 도상(圖上)의 상징은 그 도상이 가진 생태적 특징에서 발현된 것이다. 대나무도 마찬가지다. 대나무는 흔히 절개나 의리 등의 의미로 해석되는데, 역시 대나무의 생태적 특성과 연관이 있다. 대나무는 땅 위로 아직 돋아나지 않았을 때에도 ‘마디’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점을 숭상하여 ‘청풍고절(淸風高節)’, ‘고풍양절(高風亮節)’ 등이라 일컫는다. 또한, 대나무는 한겨울 추위에도 푸른 잎과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는 의리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의리와 절개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까닭은 대나무의 강한 생명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나무는 습기가 많은 열대지방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분포지가 크게 넓지 않지만, 일단 환경만 갖춰지면 매우 잘 자란다.

우리나라 대나무 그림의 대표적인 화가는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일 것이다. 이정은 조선시대 묵죽화(墨竹畵-먹으로 그린 대나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 正이란 조선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봉하(堂下)에 해당함)에 봉해졌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그는 묵죽화 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인다. 이에 반하여, 이정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 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묵죽도-탄은 이정
묵죽도 견본수묵119.1cm X 57.3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화폭에 대나무를 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백거이(白居易)는 〈화죽가畵竹歌〉에서 “식물들 중에 대나무 그리기가 어려우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나무 같이 그린 자가 비록 없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따라서 진정한 작가라면, 그림의 소재가 되는 모든 것들을 늘 세심히 관찰하고 연구하여, 대나무를 보고 또 보아, 대나무의 특질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에야 붓을 움직여야 비로소 생동하는 대나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정의 그림에서 대나무 줄기는 분명해 보인다. 댓잎은 강하고 분명한 필치로 개(介) 자로 벌어져 있다. 또 대나무 사이의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담묵과 농묵의 댓잎 표현을 분명히 구분했다. 무엇보다 그가 그린 대나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살짝 흰 줄기가 말해 주는 생동감이다. 이런 역동성에 중심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개 아래쪽에 짙은 먹으로 바위를 그리는 게 보통이다. 이런 그림은 치밀한 관찰과 사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민화로도 이어졌다. 비록 그 형상이 조금은 어설프고 단순한 듯 보이지만 대나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화조도1-가회민화박물관
화조도 20세기 초반 제작 지본채색 109cm X 33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화에서는 다양한 상징들이 한데 얽혀 그려지기 때문에 한 폭의 그림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기게 된다. 대나무나 죽순이 화병과 함께 그려지면 평안함을 의미하고, 매화나무와 함께 그려지면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를 더하게 되며, 대나무와 매화나무와 새 한 쌍이 함께 그려지면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가 된다. 봉황과 같이 그려지기도 한다.
 

화조도2-가회민화박물관
화조도 19세기 후반 제작 79.5cm X 39.5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화면 아래쪽에 그려진 화병 속에 대나무와 죽순,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고, 화면의 윗부분에는 봉황 한 쌍이 있는데, 역시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부부가 평안한 삶을 오래도록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한편, 화병 속 대나무 그림은 민화의 다른 화목에서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책거리에서도 자주 발견되곤 한다. 이때 대나무는 그림 속 문인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들과 함께 등장해, 문인으로서의 절개나 의리 등의 의미를 지닌다.

민화 속 대나무 그림에는 선비들이 사랑하는 묵죽도와는 달리 사람들이 원하는 삶과 이루고자 하는 꿈이 담겨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염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신뢰와 의리로 내 곁을 지켜줄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 바람과 희망, 열망, 염원을 품고 있다. 우리는 대나무처럼 살 수 있을까?

<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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