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술잔이 모가 나지 않으면 그게 어찌 술잔이겠느냐”
“모난 술잔이 모가 나지 않으면 그게 어찌 술잔이겠느냐”
  • 김종현
  • 승인 2021.07.2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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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25) 역할담당
공자, 군자를 밥그릇에 비유
“군자는 무엇이든 담을수 있고
한정된 용량을 담는 그릇 아냐”
사명·역할 분명히 다할 것 강조
모난 돌이라도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지키는데 의미 있어
성벽에 둥근 돌이 박혔다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빠졌을 것
공자는 군자를 밥그릇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림 이대영
공자는 군자를 밥그릇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림 이대영

 

일찍이 공자(孔子, BC 551~ BC 479)는 이해하기 어려운 군자(君子)를 밥그릇에 비유해서 “군자는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으며, 한정된 용량을 담는 그런 그릇은 아니다(君子不器).”라고 비유했다. 자기의 그릇을 넓히는 걸 예기(禮記)에서는 스스로 배우는 것(學己)으로 봤다. 자신의 사명, 역할 및 소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모난 술잔이 모가 나지 않으면 그게 어찌 술잔이라고 하겠나?”라고 역할담당(role playing)을 분명히 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벽이란 모난 성돌 하나하나가 부서져도 제자리를 지키는 데 의미가 있다. 만일 둥근 돌 하나가 성벽코너에 박혀 있다면 작은 외부충격에도 쉽게 빠진다. 그 빠진 공극으로 인해 성벽전체가 쉽게 무너진다.

지금까지 인공지능(AI)이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는 호기심을 가진 학문탐구(academic study with curiosity)다. BC 500년대 공자(孔子)는 배움이 곧 삶이다(學則生, life-long education)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우리 선인들은 죽은 사람의 혼백(魂帛), 신주(神主), 개관록(蓋棺錄), 지방(紙榜), 묘갈(墓碣) 등에다가 학생(學生)이라는 평생교육용어를 사용했다. 이를 이어 받은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1916년에 출간한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이란 책에서 ‘배움이 곧 삶이며, 삶을 통해서 배운다(Education is the real life; life is through education).’라고 우리의 학생(學生)이란 개념을 정립해서 재인식시켰다.

◇고서지학(古書誌學)에서 유기(鍮器)의 기원을 찾아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유기는 종류가 복잡하다. 놋쇠(鍮石)에 대해서 1716년에 출간된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유석(놋쇠)은 금과 같은 색이다(鍮石似金)’라고 설명했다. 원말명초(元末明初)를 살았던 조소(曹昭)는 1388년에 출간된 ‘격고요론(格古要論)’에서 “유석은 자연산 구리의 일종으로 오늘날 농아연석(菱亞鉛石) 일명 노감석의 합금이 아니다. 최방(崔昉)은 동 1근, 아연 1근을 녹여서 유석을 만들었다. 페르시아에서 산출된 진짜 아연은 황금처럼 녹고 붉으며 검지 않다(如黃金燒之,赤色不黑)”라고 적고 있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1578년에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엔 “수은(水銀)은 땅으로 가라앉으나 유석은 위로 뜬다(水銀墮地,鍮石可引上).”고 적혀있다.

‘격고요론(格古要論)’을 저술했던 1388년까지 중국은 자체 유석을 만들지 못했고, 페르시아(波斯國)에서 도입했다. 우리나라가 놋쇠(鍮石)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이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철유전(鐵鍮典)이라는 관청을 축야방(築冶房)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옛 명칭으로 되돌렸다(鐵鍮典,景德王改爲築冶房,後復故).’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범종(上院寺梵鐘)은 725(성덕왕24)년에 제작되었다. 그 범종(梵鐘)의 천판상면(天板上面) 용뉴에 ‘개원13년, 을축 3월 8일 놋쇠 총량 3천300정으로 종을 만들어 이를 여기에 기록한다(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鐘成記之都合鍮三千三百鋌).’고 새겨놓았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황동(놋쇠)이 아닌 구리와 주석으로 합금된 청동(靑銅)이었다. 그러나 속된 말로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수 있다면 밀수제비도 만들 수 있다.

또한, 752년 왕족 김태렴(金泰廉)이 신라사절단 단장(대사)으로 방일(訪日)할 때 일본 왕족과 귀족들에게 팔았던 물목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도 잡라가 있다. 신라인들은 구리-주석 합금을 ‘잡라’라고 했다. 구리-아연의 합금은 유석(鍮石) 혹은 유동(鍮銅)이라고 구분해 사용했다. 실제 사용하면서도 유동(鍮銅)을 밖에 내놓지 않았던 건 ‘신이 내린 소중한 쇠(임금)’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예 진골수레에 대한 규정으로 ‘고리(環)는 금, 은, 놋쇠로 만들지 말고, 보요(步搖) 역시 금, 은 및 놋쇠를 금지한다(環禁金銀鍮石, 步搖亦禁金銀鍮石).’고 귀족들에게도 사치를 금지했다.

한편, 서양의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에선 놋쇠(황동, brass)에 해당하는 단어를 검색하니 39번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시편 107편 16절 “그가 놋쇠(bronze)문을 깨뜨리시며, 쇠(iron)빗장을 꺾으셨다(For He has shattered gates of bronze / And cut bars of iron asunder.”라는 표현이다. 대부분 고대 히브리어 강철(steel), 구리(copper) 혹은 청동(bronze)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네초셰스(nechosheth)’를 번역한 것이며, 황동(녹쇠)은 아니었다. 신라도 황동(brass)과 청동(bronze)을 혼동했듯이 로마시대에도 혼동했다가 중세기 혹은 16세기에 들어와서 구분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Shakespearean English) 65번 소네트 ‘황동도 돌도 땅도 무한한 바다부터(Since brass, nor stone, nor earth, nor boundless sea)’에서도 청동 혹은 구리를 혼동해서 황동(brass)이라는 표현을 했다. 다양한 광물질과 구리를 의미하는 ‘황금색 구리(yellow copper)’에는 황동석(chalcopyrite)과 황동합금(brass)을 포함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유석(鍮石)을 사용한 사례는 i) 태조왕건(太祖王建)은 관등 9등품에 따라 청색복제와 유석 요대(九品服以靑 帶以鍮石)를 규정했고, ii) 귀족들이 유석동환(鍮石銅環) 혹은 유석동구(鍮石銅鉤), 금도우석봉구(金鍍鍮石鳳鉤)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iii) 1164(의종18)년 조동희(趙冬曦)는 차내전숭반(借內殿崇班)으로 하여금 송국(宋國)에 유기(鍮器)를 헌납했다. 귀족들이 유동자(鍮銅瓷)의 물건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건국초기부터 유기생산을 장려하여 세종(世宗) 때에는 황해도 봉산군과 장연현에서 노감석(爐甘石, 황동석)을 채굴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卷二十三) 1424(世宗6)년 2월 7일에 행호군(行護軍)에 있는 백환(白環)이란 사람이 상소한 글(行護軍白環陳言)에 녹쇠동전주조(鍮錢鑄造)를 건의하고 있다. 성종실록에서는 1483(성종14)년 4월 23일 일본에서 대마도 태수 소 사다쿠니(宗貞國, そう さだくに,1422~ 1494)를 조선에 보내서 구리매입을 타진했으나 거부했고, 10월 29일 오오우치 마사히로(おおうち まさひろ) 등의 조선협상단이 돌아왔는데 구리광물 값에 불만을 표시했다. 1485(성종16)년에 일본과 구리광물 교역을 금지시켰다. 이어 1679년(숙종5)년에 비변사에선 유기금단사목(鍮器禁斷事目)까지 제정했다. 숙종(肅宗, 재위 1661 ~ 1720) 때에는 경상도 양산에서 유랍(아연)을 생산했다. 또한 유전주조로 놋쇠사용이 넓어져서 중앙과 지방관아에 놋쇠를 다루는 전문유장(鍮匠)이 있었다. 1775년(영조 51년) 호조(戶曹)가 별장제를 폐지하고 수령수세제(首領受稅制)로 혁신함에 따라 영세광산업자가 광산개발에 대거 참여했다. 상업자본이 광산개발에 유입되어 민간사업에서도 유기제작이 성행하였다. 조선말기에는 한성(漢城), 개성(開城), 안성(安城), 구례(求禮), 남원(南原), 김천(金泉), 봉화(奉化) 등지에 유기시장(鍮器市場)이 형성되어 사용량이 크게 늘어났다.

18세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1830년 현재 전국에 1천52개의 장시(場市)가 있었고, 보부상(褓負商)들이 날짜를 정해 교역을 했는데 보상(褓商, 보따리부인들)의 대부분은 부피가 작고 가벼운 포목(布木)과 유기(鍮器)를 취급했다. 이규경(李圭景, 1788 ~ 1856)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선 ‘우리 동쪽나라의 유동(我東鍮)은 일반적으로 징과 꽹과리처럼 소리울림을 내는 황동(響銅)이었다.’고 적고 있다.

놋쇠(黃銅)를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i) 유철(鍮鐵)은 동 70∼72%에 주석(일명 상납)을 30∼28% 혼합, ii) 청철(靑鐵)은 일명 상철(上鐵)이라고도 하는데, 동 80∼85%에 주석 20∼15%를 배합, iii) 주철(朱鐵)은 동 90∼95%에 주석 10∼5%의 합금이다. 일반적인 ‘방짜놋쇠’는 유철(鍮鐵), 청철(靑鐵), 주철(朱鐵)을 총칭한다. 주로 두들겨서 만든 대야, 양푼이, 수저, 젓가락, 놋상, 놋보시기(섭씨 4도로 김치 맛을 최고로 유지하는 그릇), 놋동이, 징, 꽹과리 등이 있다. 망치로 두들기는(鍛造) 방짜유기는 화기(火氣)에는 물리적 변형이 생기는 취약점이 있으나 외부타격에는 강하다. iv) 황동(黃銅)은 동 60∼65%에 아연 40∼35%를 혼합한 합금으로 향로(香爐), 향합(香盒), 촛대(燭臺), 화로(火爐) 등에, 황동놋쇠는 황금빛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애호했다. 일반적으로 방짜가 아닌 이와 같은 주조놋쇠를 ‘퉁쇠’ 혹은 ‘서민쇠’라고 했다. 방짜쇠(단조녹쇠)는 인체에 해롭지 않아 식기(食器)과 악기(樂器)에 사용되어 일명 ‘망치쇠’ 혹은 ‘양반쇠’라고 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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