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음식 세계로]동인동 찜갈비 담는 양은냄비엔 식민지하 아픈 역사 서려
[대구음식 세계로]동인동 찜갈비 담는 양은냄비엔 식민지하 아픈 역사 서려
  • 김종현
  • 승인 2021.08.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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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밥그릇 역사
대구에 침략 병참기지 세운 일본
전시물자 부족에 놋쇠 강제공출
알루미늄에 아연 입힌 양은·양백
오늘날도 라면·갈비 요리에 사용
1970년대부터 스텐밥그릇 인기
모든 식당에 스텐 사용 행정명령
식량증산·시민 건강 챙긴 시책
양은양백그릇
스텐이전에 사용된 양은 그릇. 그림 이대영

1601년 안동에서 대구로 이전해온 경상감영은 조선조정 다음가는 정치적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상국(相國) 상당의 감사들이 많이 내려왔으며, “경상감사 한 번 지내면 7대가 배 두드리고 복락을 누릴 수 있다(相國慶監,一享經後, 七代鼓腹, 享樂萬世)”라는 조정비언(朝廷鄙諺)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음식에서는 산해진미의 진공뿐만 아니라, 영남유림의 향음주례(鄕飮酒禮)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산갓김치와 영채김치(靈菜菹)는 국왕 아니고서는 이곳밖에 없는 별미(特味)였다. 여기에다가 금상첨화 김천 양반쇠로 만든 보시기에 산갓김치를 담아 먹는다는 건 한양 국왕조차도 못 누릴 호사였다. 김치보시기와 전립투의 음식을 먹을 때 한양 국왕은 요사이 표현으로 ‘눈 아래에 있었다.’

대구시는 2007년 5월 25일에 방짜유기박물관을 개관해 i) 방짜유기의 제작기술 전승과 보존, ii) 지역음식문화의 역사전시와 미래먹거리 개안(開眼)에 단서를 제공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관급유기문화(官給鍮器文化)를 보여줬다. 방짜유기박물관이 터를 잡은 팔공산 아가씨의 청남치마 자락을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바라보면서 “이름은 귀공주인데 험준하게도 생겼구먼, 돌부리 다리에 걸릴 듯 동남으로 간다면 며칠을 걸리겠네. 얼마나 많은 풍광을 읊기란 부득이 내 능력으론 못하겠네. 다만, 초취한 이유를 들어 변명하는 중이라니.”

또한 달성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금암서원(琴巖書院)에 모셔져 있는 정사철(鄭師哲, 1530~1593)은 ‘팔공산 유람(遊公山)’라는 시에서 “나막신에다가 단장을 짚고, 팔공산을 찾아드니, 깊은 골짜기 돌문 위엔 흰 구름이 한 조각 걸려있네. 저 구름처럼 그대는 높이 날아오르는 비결을 모르네 그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가보니 어느 듯 정상에 오를 그려”라고 백운심처(白雲深處)를 노래했다.

◇ 일제병참기지 대구, 유기공출(鍮器供出)에 앞장서

일본은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란 원대한 대일본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스프링보드(spring board)로 대구에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를 건설했다.

태평양전쟁을 1941년에 개시했으나 소총에서 각종포탄에까지 사용되는 탄피 신쮸(眞鍮, 뇟쇠)의 폭증하는 수요에 공급은 태부족이었다. 전시물자동원령을 내려 놋쇠로 된 모든 물건을 강제로 공출시켰다. 탄압해도 저항이 심각해지자, 동남아산 철반석(鐵礬石) 혹은 보크사이트(Bauxite)로 만든 알루미늄에다가 중독성을 위장하기 위해 아연을 도금했다. 또한 조선이 열광하는 은식기(銀食器)라는 의미를 빌려다가 양은(洋銀, Western Silver) 혹은 백금식기(白金食器)라는 의미로 양백(洋白, German silver)이란 명칭을 붙여 대체재로 판매했다. 인기는 대단했으며, 인심쓰는 척 맞바꾸기까지 했다.

양은이나 양백은 알루미늄에다가 아연(황색) 혹은 니켈(백색)로 도금피막을 입힌 알루미늄 그릇이었다. 알루미늄은 열전도율에선 철보다 높아서 오늘날도 라면, 쇠갈비 요리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아연 15∼30%, 니켈 10∼20% 도금피막을 입혔기에 벗겨질 경우는 알루미늄 중금속 중독이 발생했다.

이런 알루미늄 중독사건은 서양에서만 몇 차례 언론에 게재되어 동서양의 미식가(美食家)들의 우려를 사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발명가 해리 브리얼리(Harry Brearley, 1871~1948)는 1913년 8월 새로운 밥그릇 대상물질 탐색연구를 하다가 버린 쇳조각이 빗물에서 반짝이는 걸 보고, 크롬과 니켈로 합금강철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을 개발했고, 1920년에 식기를 제작했다. 일본제국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았으나 조선반도에 한정해서 문제의 양은그릇을 공급했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 놋쇠 밥그릇이 유행되었던 이유는, 오늘날 코로나19(COVID19)와 메르스(MERS) 바이러스가 구리이온에 의해 퇴치된다는 뉴스를 당시는 몰랐지만, 경험상으로 구리(銅), 주석(朱錫), 아연(亞鉛)이란 금속이온이 미생물에게 미량동효과(微量動效果, oligo-dynamic effect)로 인해 살균처리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식중독 예방뿐만 아니더라도 음식부패까지를 방지했다. 특히 놋그릇에 김치를 담아놓으면 유산균 이외의 잡균들이 생존하지 못해서 ‘맛도 들지 않고 군둥내(잡스럽운 냄새)부터 나는 일을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다시 놋그릇이 유행했으나, 1960년 초반에 스테인리스 스틸(스텐) 밥그릇이 도입되었으나 유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삼림녹화 차원에서 땔감벌목을 금지시키고 연탄사용정책으로 구공탄가스로 인해 i) 기와집의 물받이함석이 녹아내렸고, ii) 주방의 놋그릇이 검정색으로 변색되어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지만 스텐밥그릇으로 서서히 교체되기 시작했다.

우리 속담에 “절간에 가도 눈치 빠른 사람은 새우젓국물을 챙긴다”라고 했듯이, 1973년 1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임명한 서울시장 양택식(梁鐸植, 1924~2012) 시장은 스텐밥그릇으로 교체되는 세상흐름을 간파했다. 표준식단과 스텐공기(지름 11.5cm, 높이 7.5cm)를 제시했고, 이를 통해 서울시에 전 시민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이어 받아 중앙정부는 1974년 12월 4일부터 모든 식당에선 스텐밥공기에만 담도록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1976년 6월 29일 서울시는 정부정책에 솔선수범하는 모양새를 내고자 7월 13일부터 스텐밥공기 의무화를 서울특별시 요식협회에 시달했다. 동시에 밥공기 크기를 지름 10.5cm 높이 6cm로 대폭 축소했다.

정의사회구현(正義社會具顯)을 슬로건으로 출범했던 제5공화국(1981년)의 보건사회부는 ‘주민편의 100가지 시책’의 하나로 서울시 규정을 전국에 적용하는 행정조치를 내렸다. 이렇게 스텐밥공기는 1석 3조의 효과를 거두었으니, i) 동시에 많은 밥을 해놓고 미리 담아놓은 밥그릇을 제공하면 조리시간과 에너지 절약, ii) 밥공기를 축소해서 식량소비량을 절감, iii) 밥그릇을 삶을 수 있어 위생적이고 잘 파손되지 않아 경제적이었다. 이로 인해서 식량증산과 다이어트로 건강까지 챙겼다는 1석5조 효과(一石五鳥效果)를 얻었다는 최고특수시책이었다.

최근 대구시는 이런 밥그릇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거꾸로 홱~ 돌리는 시책을 실시했다. 즉 2006년 대구십미(大邱十味)를 개발하고, 동인동(東仁洞) 찜 갈비라는 절미(絶味)를 전통과 추억의 맛(taste of tradition and memory)을 더하고자 양은냄비그릇에 담아내도록 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일제식민지 시절의 알루미늄 중금속 논란을 불러오지 않았고, 오히려 대구전통과 추억의 맛으로 홍보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 소고기갈비찜 미식가들에게는 찜찜함(leery)을 제공하고 있다. 대구전통(tradition)과 추억의 맛(taste of memories)에는 i) 놋그릇 강제공출로 대신 대체된 양은그릇이란 피식민지 아픈 역사와 ii) 6·25전쟁 이후 해장국이나 라면을 끓어먹던 양은냄비(western-silver pan)라는 추억이 동인 찜갈비 양은냄비에 오버랩(overlap)되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日本江戶時代) 1567년 교토(京都) ‘고등어 도로(サバ道路)’ 길섶에 ‘야마바나 헤이하치자야(山ばな平八茶屋)’라는 찻집이 열렸다. 찻집으로 명맥유지가 어려워지자 민물고기 요릿집으로 변신했고, 오늘날까지 444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 식당의 생존비결(生存秘訣)은 도자기밥그릇이 말해주고 있다. 한 마디로 i) 밥맛과 친절은 접어두고, ii) 밥그릇의 숨은 멋은 계절감각을 담은 그릇모양, 색체와 디자인에 있다. ‘신이 숨어 있는 디테일’은 밥공기를 여는 순간 뚜껑안쪽에 겨울철에는 붉은빛에 푸른 잎이 달린 동백꽃 한 송이, 여름엔 푸른빛 싱싱한 표주박이 입맛을 돋운다. iii) 20번째 안주인(女將, おおかみ)에게 ‘음식 맛’에 대해 정의를 물었더니 : 자연을 함축한 재료의 싱싱함(身土不二), 조리하는 사람의 정성, 접시(밥그릇) 위에 대자연을 전개하는 미학(plating art), 진실의 순간에 진실의 맛(taste of authenticity)을 제공함, 먹기 전 첫 눈에 감동과 탄성(歎聲)이 나오는 상상의 맛이라고.

중세시대 일본귀족에게 봉토(封土, lehen)는 ‘한곳에 매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영지(一所懸命の領地)’였다. 에도시대, 교토지역의 조루리 노래가사에서 ‘열심히(hard)’에 해당하는 일본어인 ‘잇쇼겐메이(一生懸命)’가 시작되었다. 잇쇼겐메이(一生懸命, いっしょうけんめい) 즉 “하나를 위해 살아가되 목숨을 건다(一生懸命)”라는 뜻이다. 일은 목숨을 걸고 할 대상이고, 제품은 자신의 분신(分身)이다. 그래서 음식(요리)전문가로 i) 신선한 제철 음식에 대한 재료를 고민하고, ii) 가장 맛있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걸 ‘고치소(御馳走)’라 한다. 축소해석을 해도 ‘분주하게 달리면서 정성을 쏟음’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고선 반드시 “잘 먹었습니다”라는 뜻으로 “고치소사마데시다(御馳走)”라는 인사를 한다. 노고에 대해 ‘예수님(사마)’처럼 ‘고치소사마(御馳走樣)’라고 객체 극존칭을 붙인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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