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필 때 앞줄에 서 있던 난(蘭)이
꽃 지자 뒷줄이다
퇴역, 황금빛 화분의 대열에서 뒤로 밀린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걸 숙명이라 하고
밀려난 난 조차도 미련을 들먹이지 않는다
해안가 버려진 폐선처럼 밀려나
바다에 들지 못해 덕지덕지 개흙 엉겨 붙은들
시나브로 마감된 풍경의 등 뒤를 지키기에
당신의 하루는 얼마나 고단할까
그동안 나만 바라보았다는 치사한 너의 변명도
왠지 다감하게 힐끗거리고 싶은 나도
머지않아 뒷줄의 난(蘭)
삐죽 솟아난 소원의 누대에
새로 들인 싱싱한 난(蘭)이 올려지는
그게 이치라는 듯
다시 환해지는 앞줄
◇김정아 = 경북 상주 출생. 형상시학회, 대구시인협회, 문장작가회 회원. 시집 :『채널의 입술』.
<해설> 언제 꽃대를 올렸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향기에 이끌려 발견한, 개화를 이미 시작한 난(蘭)을 앞줄로 놓고, 왜 미리 꽃대 올리는 것부터 보지 못했을까를 자책한 적이 있다. 이제라도 보면 되는 거였지만, 두근두근하는 그 순간을 놓쳤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의 기분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꽃이 피기 시작한 난을 앞줄에 놓고 감상하다가, 지고 난 뒤에 다시 진열대의 뒷줄로 보내는 것만으로 세상의 이치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시로 적은 시인은 이미 앞줄에서 환히 밝히는 이가 그 임무를 끝내고 뒷줄로 간 뒤에도,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는 마음 따뜻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소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