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거지삼계탕에 인삼주 ‘캬~’… 천하일미가 따로 없네
벙거지삼계탕에 인삼주 ‘캬~’… 천하일미가 따로 없네
  • 김종현
  • 승인 2021.09.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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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32) 경상감영의 음식문화
관찰사 겸 대구부사 김신원
감영음식문화 대중화 큰 역할
청송·김천서 만든 전립투 유부로
여름철 벙거지삼계탕 즐겨 먹어
팔공산 등지서 탁족시회 열기도
한일합방 이전까지 409년간
사대부 음식·서민들에 큰 영향
양반쇠서민쇠
양반이 먹을 수 있었던 삼계탕처럼 그릇에도 양반쇠와 서민쇠가 있었다. 그림 이대영

일제식민지 시기 삼계탕에 대해선 조선의 닭국이나 백숙을 삼계탕의 원형으로 봤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서양의 양계사업을 벤치마킹해서 양계권장을 했다. 당시는 삼계탕이라고 해도 인삼가루를 첨가해서 끓이는 것인데, 간혹 인삼을 통째로 넣었다.

1930년 ‘일본지리풍속대계16권(日本地理風俗大系十六卷, 新光社出版, 202面)’에선 “하계 3개월 동안 인삼과 찹쌀 조금만 암탉 가슴 속에 묻고 그 모습 그대로 달여 낸 삼계탕(けいじんとう)이라고 하네. 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자강효과와 만병에도 시달리지 않는다네. 부자라서 먹을 수 있다네”라고 삼계탕 이름이 최초로 등장했다. 1935년 ‘성장해가는 경성전기’에서도 “진정한 조선요리는 귀족상류층의 점유이며, 평생경성에 살았던 사람의 입에도 들어오지 않는 음식” 삼계탕이었다.

우리나라가 복날 삼계탕을 먹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장어(ウナギ)를 먹는데, 감기 등의 열이 있는 경우 심장박동을 유발할 우려로 일본에서는 인삼을 금지한다. 중국에서는 삼계탕과 유사한 음식으로 한족의 약선(藥膳)인 공계탕과 호북지방의 전통 잔치음식인 청돈전계가 있는데 인삼 대신 곡물을 넣는다. 대만에는 생강, 쌀술(米酒)과 닭고기로 만든 마유계라는 음식이 있다. 미국에서도 닭고기수프에 연꽃씨앗(蓮子, lotus seeds) 혹은 연근(蓮根, lotus root)을 가미한 ‘연우탕(lotus-root chicken soup)’을 먹는다. 삼계탕 이외에도 오골계탕(烏骨鷄湯), 옻나무를 넣은 칠계탕(漆鷄湯, lacquer chicken soup), 닭고기에 자라, 전복, 잉어를 더한 용봉탕(龍鳳湯)이 있다.

최근 서울에서는 과식과 비만을 방지하고자 ‘닭 반 마리’로 만드는 반계탕(半鷄湯, half chicken soup)이 유행하고 있다.

◇ 약치불여식치(藥治不如食治), 계삼탕(鷄蔘湯)

계삼탕과 달구벌의 비밀코드를 풀고자, 2017년 ‘해법찾기해외여행(solution-seeking oversea tour)’으로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은 역사박제를 전시한 곳만이 아니라, 미래의 씨앗이 숙면하고 있는 곳(A place where history is stuffed but the seeds of the future are sleeping well)이다.

가장 먼저 BC 196년경에 만들어진 로제타석(Rosetta Stone) 전시물을 구경하고 관련서적을 구입했다. 해독기법은 비문으로 작성된 신성문자, 민중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 3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황금열쇠는 이미 알고 있는 고대그리스어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1790~ 1832)과 토머스 영(1773~ 1829)이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ics)를 하나하나 대조해 끝내 모두 다 풀어헤쳤다.

로제타석 해법을 원용해 달구벌의 계삼탕이란 식치개념 형성에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해부단계로 : i) 현재 대구에서 삼계탕음식 문화현실, ii) 현재와 해방 전까지의 삼계탕의 음식문화의 변천과정, iii) 일제식민지시대 일본대륙침략병참기지로 대구의 음식문화와 삼계탕, iv) 1658년 약령시를 개장해서 362년간 약치가 삼계탕이란 식치기반으로 약으로는 못 고치는 병을 음식으로 고치자(藥治不如食治)는 약선사상이 정착, v) 1601년부터 대구에 이전해 온 경상감영에서 한양 조선조정 다음가는 관존(감영)음식문화, vi) 임진왜란이전에서 신라시대의 군사적 요새로 삼국음식융합문화, vii) 신라토기가마에서 출토된 토기(옹기)를 사용했던 음식, viii) 천계신화를 기반으로 했던 금계국 신라 땅 달구벌을 더듬어 올라간다. 한마디로 현대→ 근대→ 고대라는 역추적과정을 통해서 단서를 찾고자 한다.

대구시민의 한 사람으로 같이 고민하자는 입장에서, 현존 삼계탕 음식문화는 식당에서 i) 돌솥삼계탕을 종종 먹는데, ii) 어릴 땐 약탕관삼계탕 혹은 도가니삼계탕을 먹었다. iii) 물론 삼계탕뿐만 아니라 개장국 즉 보신탕은 질그릇에 담아먹었다. 그런데 오늘날 삼계탕은 풍기, 금산 등의 인삼생산지가 소비도시인 대구시보다 더 성행하고 있다. 삼계탕의 세계화를 위해서 삼계탕 본향인 대구보다도 전북, 경북 풍기(영주시), 충남 금산군, 축협 및 하림(주) 등에서 전문적인 연구와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사실상 삼계탕의 문화와 신라웅계탕(新羅雄鷄湯)의 본향이었던 대구시는 정작 삼계탕 세계화에는 생각도 행동도 없어 보인다.

대구시의 약치를 살펴보면, 1658년(효종 9년) 경상감사 임의백 관찰사가 서측객사(대안동)에서 한약재와 약초를 판매하는 약령시(약초저잣거리)를 열었다. 1677년(숙종 3년) 경상도 대동법 실시로 약령시가 중흥되었다. 1908년 현재 위치인 남성로로 이전했다. 1909년 대구한약흥업회 발족(한약협회 전신)과 1914년 9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시장규칙으로 감시감독이 시작되었다. 대구약재상은 ‘약령시진흥동맹회’를 결성했다. 1938년 5월 전시총동원법 제정과 동원령을 발동하였으며, 1941년 총독부에서 약령시를 폐쇄했다.

1978년 9월 13일 약령시 부활 추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 28일 개장했다. 1985년 대구약령시 명소거리 지정을 받는 과정 속에서도 인삼은 약치에서 머물지 않고 각종기능식품으로 혹은 식치로 퓨전(fusion)화를 시도했다. 인삼이 들어가는 삼계탕의 명맥을 그런 대로 유지해 왔다.

감영음식문화를 더듬어 보면, 관찰사 겸 대구부사 김신원(金信元, 1553~1614)이 1601년(辛丑年) 6월 24일 경상감영을 대구로 이전한 뒤 경상감영에서는 감영음식문화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립투 혹은 벙거지모자 모양의 놋쇠솥으로 겨울철 전골뿐만 아니라, 여름철엔 속칭 벙거지삼계탕(氈笠套蔘鷄湯)이 감영음식의 백미였다. 삼계탕국물, 술안주 닭고기와 인삼주를 겻들이면 천하일미였다. 한자 술 주(酒)자에 닭유(酉)가 붙을 정도로 술안주로는 닭고기가 별미였다.

경상도 관할 청송과 김천에서 생산했던 전립투 유부(鍮釜)로 삼계탕전골에는‘경상감영맞춤’이었다. 삼복더위에는 팔공산 깊은 수태골 등에서 탁족시회(濯足詩會)가 개최되었다. 이때에도 벙거지삼계탕을 먹고 마시면서 가무를 겸한 뒤풀이까지 했다. 1910년 합일합방이전까지 409년간 경상감영음식문화가 사대부의 음식과 지역서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팽이형토기 비밀코드로 기원단서 찾기

마지막으로 음식문화의 기원과 관련된 밥그릇을 추적한다면, 달구벌 신라토기가마터(玉山土器窯)로 i) 대구 수성구 욱수동 41기, ii) 대구 달서구 신당동 4기 및 iii) 대구 달서구 동원동 6기가 하나같이 반지하식 오름가마(登窯)로 봐서 5세기 혹은 7세기 중엽까지 토기와 옹기(방수성 토기)를 생산했다.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었지만 삼계탕과 관련성을 규명하기 위해 팽이형옹기(甕器), 장독형 혹은 항아리형 옹기를 살펴봐야 한다. 용도를 밝히면 당시 신석기 → 청동기시대의 음식과 음식문화를 더듬을 수 있다.

가장 정확한 비밀코드는 바로 선사시대의 문자다. 그러나 그런 문자기록은 없다. 단지 갖고 있는 건 출토유물 뿐이다. 출토유물 가운데 토기무늬는 대략 누른 무늬(口邊文), 덧무늬(隆起文 : 集線文, 格子文), 빗살무늬(櫛文), 민무늬(無文)를 해독해야 한다. 이들 무늬의 의미 혹은 비밀코드를 해독하자면 : i) 가장 단순하게 토기아가리 주변에 누른 무늬는 단단하게 소성되도록 소성 전 압착으로 볼 수 있다. 덧무늬나 빗살무늬는 동물 털을 빗질하듯이 그릇을 잘 만들기 위한 주문이다. 보다 더 인간의 지혜를 확장시킨다면 ii) 만드는 사람의 의미(기원, 구복, 염원 등), iii) 그릇의 용도 혹은 제작목적(담을 음식, 제사, 기념, 전쟁승리 등) 및 iv) 오늘날의 브랜드(烙印)처럼 자신의 명예와 후손에게 남길 무형재산으로 무늬를 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모른다는 핑계로 의미를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삼각형, 사각형, 동심원 등 기하학적인 무늬라고 넘기고 만다. 그러나 당시를 살았던 선인들은 지혜를 총동원해서 의미를 표시했다. 우리는 단순히 미개인들이라고 무시하기보다 오늘날의 과학인 상징예술학(symbolic art), 기호학(semiotics), 의미고고학(semantic archeology) 등을 원용해서라도 해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인들과의 의미전달은 단절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단서까지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치 로제타석 해독기법처럼 ‘현재 알고 있는 열쇠로 모르는 자물쇠를 풀자(Let’s unlock what we know now with a key.)’ 즉 “적어도 내가 당시 그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그 당시 문화수준에서는 무슨 용도로 사용했을까? 그 정도의 수준으로 오늘날에는 무슨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오늘날 물건은 무엇일까?”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법이 있다.

만일 대구에서 출토된 팽이형토기(옹기)에 대해서 6세기경 당시를 추정한다면 i) 반지하식 오름가마(登窯)에서는적어도 1,000~1,100℃까지 고온소성(高溫塑性)이 가능했다. 유리화(vitrification)된 도자기 소성이 가능했다. ii) 팽이형토기(옹기)로는 방수성이 확보되기에 땅에 묻어 김치, 된장 등의 발효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iii) 뿐만 아니라 방수성과 견고성으로 봐서 그릇바닥 밑에 불돌 3개만 놓으면(삼발이 장치) 밥 짓기와 국끓이기는 가능했다. 따라서 국왕이나 지배귀족들은 경제력이 허용한다면 삼계탕과 같은 음식을 충분히 끓어먹었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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