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파괴는 ‘절대악’…지구는 두 개가 아닙니다
자연 파괴는 ‘절대악’…지구는 두 개가 아닙니다
  • 채영택
  • 승인 2021.10.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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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 (23) 인간과 자연의 공존
자연의 유기성
모든 구성요소 밀접하게 결합
하나의 위협은 전체로 퍼져
인간도 유기적 객체의 일부
공존의 세계관 정립이 필요
새로운 인식기반 구축을
인간-자연 이원론적 관점 벗어나
환경보호 실용주의적 접근 필요
사진3
자연스러움을 살린 물길 가꾸기가 보는 이들에게 편한함을 안겨주고 있다.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를 통해 살아왔다. 이러한 자연의 혜택을 미래에 누리기 위해서는 훼손되고 파괴된 자연환경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연적, 인공적 위험이 없는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6항은 “국가는 재난을 예방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는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으며,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국민이 재난대응훈련에 적극 참여하고 위기의식과 위기대응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앞서 지역사회의 빠른 회복을 위해 일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된 것처럼 통일된 전체를 형성한다. 각 개체의 다양성과 차이를 추구하며 각 생명의 존재와 다양성의 자율성을 인식하고 일체화된 전체의 하나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상호 의존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슬이 위협을 받으면 그 영향이 유기체 전체로 퍼진다. 이것이 생태계 먹이사슬이다. 따라서 인간도 유기적 본성의 일부이기에 인간의 주체적 사고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행위에 의해 유기적 질서가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에 속한다는 자연주의 철학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연은 인간의 것이라는 인본주의적 철학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자연환경보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에게 있어 자연의 유용성,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지나치게 도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인간중심주의의 특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집중하게 된다면 여전히 편협한 대안만 찾을 것이다. 자연환경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유기체는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적 과정이며 유기체의 변화가 핵심이다. 유기체의 변화는 환경의 힘에 반응하여 반응하는 자율적 변화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소 간의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자연의 유기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자연에 대한 유기적 견해, 자율성과 유기성의 원칙을 가진 자연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유기성의 개념은 자발적인 움직임, 과정, 성장 및 변화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사실 자연보호의 실천에서 이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자연보호 실천에 있어 생명 관점에서 자연관과 인간관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는 것이다. 광범위하거나 포괄적이지 않다. 다소 추상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다. 자연환경의 본질적 가치를 대변하는 내재적 가치는 유기적 관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패러다임을 확립하기 위한 제안이다. 인류는 성장과 발전의 여정이 진행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역관계에서 파생된 자연환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생태계의 파괴로 수많은 종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인류의 존재 자체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는 기존 패러다임의 어떤 기술로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혁신적 탐색은 현재의 패러다임에 적용되어야 한다.

자연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 간의 공존의 세계관의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차츰 인간의 자연재정립과 자연관으로 인해 ‘공존’의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자연의 사용과 이용을 통한 자연환경정복과 자연환경개발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조건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존의 세계관을 정립하여 인류의 생존을 보장함에 있어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함을 훼손과 파괴에 측면을 고려한다면,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명목 아래 자연환경보전은 어느 쪽이든 편향될 수 있다. 자연환경의 유기체적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중심적 이원론에서 자연과 인간을 규정짓고 있으며 이분법적 인식은 도구적 사용에 효력성을 발휘하는 사회구조이고 경제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존의 세계관이 일반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존의 세계관이 일반화가 될 때 비로써 자연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존재론적 유기체적 설정이 가능하다. 존재적으로 설정해서 접근하는 것에는 유기체적 자연환경을 인정하고 거기에 인간을 인정하는 방식이라야 공존의 개념이 정립될 수 있다고 본다.

◇자연환경 파괴는 절대 악

생태계의 파괴와 자연환경의 파괴를 절대 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과 인식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자연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기에 책임감과 윤리 의식도 가져야 한다. 자연과 인간을 상생의 개념으로 삼는 것은 자연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인간의 삶을 축적해 온 산업, 과학, 기술 문명이 가치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른 천연자원의 소비로 생태계는 계속해서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며, 자연 훼손과 황폐화는 가속된다. 이를 통해 인류의 멸망은 머지 않은 미래에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온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이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삶의 방향을 찾는 자연관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공존의 삶의 방향으로 찾고 삶에 대한 존중심을 갖는 것이다.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공존이념으로 경외에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이 함께 담겨 있다. 그가 말하는 생명존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으로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했던 초고 시절이 있었다. 긴 역사 속에 방심하던 인류은 다시 자연환경 위기를 겪으면서 자연을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삶의 질 향상의 일환으로 자연을 부각시켰지만 자연을 두려워하고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구가 두 개 없다는 사실이 인간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자연보호단체들이 호소하는 산업기술의 무모한 피해, 오염된 공기, 생태계 파괴의 위기,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자연보전 문제에 대한 논란이 사치스럽고 무모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생태파괴, 자연훼손, 환경오염 문제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이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미래역사와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본 철학은 인간의 개념에 세워져야 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추구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겨남에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훼손과 회복에 이르기까지 상호 연결된 일련의 과정이며, 순환적이고 순차적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순환적이고 순차적인 흐름이 항상 연결되고 관계적이며 자율적이며 유능한 것은 당연하다. 유기체적 실현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숲이 울창하면 새가 날아가 듯” 마치 소풍 나온 고양이가 사람들이 가꾸어 놓은 정원에서 마냥 뒹굴고 다니는 것,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어르신들을 위해 꾸며 놓은 정원이지만 새와 고양이가 보기엔 정원의 주인은 어르신들이기보다 그들의 보금자리이다.

◇ 인간과 자연의 만남

사계절을 지키며 흙을 파고 씨를 심어 물을 뿌려 싱그러운 정원이 조성되면 새들은 먼저 와서 지저귀며 노랫소리로 화답을 한다. 인생 여정의 마지막을 안식하기 위해 찾아온 요양원 어른들은 새와 나무와 고양이와 숲 이들의 어우러진 전경 속에서 하루의 느긋함을 만끽한다. 이들의 구성원들은 영양사가 정성스럽게 맞춰 주는 밥맛과 함께 온종일 휴식과 안락을 정원에서 채워 나간다. 인간의 분주한 발걸음을 잡아당겨 휴식이라는 안식을 선물하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금잔화는 인간의 웃음에 기쁨을 선사한다. 세월이 힘에 겨워 누군가를 그리워 기다려야 하는 어르신들의 긴 하루의 여정을 평안으로 채워 준다. 손길을 다하지 못한 죄송함이 발끝에 맺혀 있는 자녀에게도 새 고양이 강이지 꽃 나무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은 안도를 확인시켜 준다. 자연과 인간은 이처럼 서로 유기적이다.

유기적 접근은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생명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지속적이고 존재론적인 생명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종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찾는다. 그러나 선례는 인간이 자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생태에서 자연과 인간을 자연과 자연을 생명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이며 다른 생물 및 자연환경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자연유산이다. 자연환경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므로 인간과 자연환경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시각이 일상생활에 확산될 때 공존이 가능하다.
 

 

신경용<자연보호대구시달성군협의회장·금화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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