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배움에 끝이 없고 돈독하게 행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널리 배움에 끝이 없고 돈독하게 행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 김종현
  • 승인 2021.10.1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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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34) 선비의 길
공자가 제시한 선비의 6가지 품행
예의·음악·사술·기마·서도·계측
학문의 기반 위에 육예를 갖추고
나라 위기 땐 붓 놓고 칼을 잡아야
“거처는 사치나 넘침이 없어야 하고
먹고 마심이 지나쳐서는 아니되며
충성과 신용으로 갑옷과 투구 삼고
예절과 의리로 무기와 방패 삼는다”
진리탐구의빛
진리탐구의 빛과 우리의 선조인 선비들이 외쳤던 ‘배움은 삶이고, 삶이란 배움이다’라는 개념을 비교해 보자. 그림 이대영

동이족(東夷族)인 공자(孔子, BC 551~BC 479)는 선비로써 행동거지(儒行)를 말할 때 선비족(東夷族)의 성품과 행실을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모델화했다.

여기서 동이족이 나오는데 화한(中華)사상에서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이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오랑캐라는 뜻이 아니다. 은허(殷墟)문화를 이륙했던 구이족(九夷族)이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의미를 강조했던 말이다.

허신(許愼, 58~148)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동방으로 간 사람이다. 대의를 따르고 활을 잘 구사한다... 인성이 대자연의 순리를 따르기에 어질고 오래 살기에 군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대자연과 땅이 컷으며, 사람들도 장대했다.” 445년에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서는 “예기왕제에서 말하기는 동방을 이(夷)라고 했으며, 의미하는 바른 근본(根本)이며, 언행이 어질고 삶이 즐거웠으며, 만물이 근본적으로 땅에서 산출했다. 매사는 풍속과 이치에 통했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했으며, 변화가 도리에 따라 군자(君子)와 불사(不死)의 나라였다.”고 했다.

그래서 논어(論語, BC 480~ BC 350)에선 “공자께서 구이족(九夷族)과 같이 살고자 했다. ‘사람이 그렇게 누추한 곳에서 어찌 사시겠습니까?’ 라고 하자, 공자는 ‘군자와 같이 사는데 뭐가 그렇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던 곳이다.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1710년에 편찬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살펴봐도 ‘이(夷)’는 문헌상으로는 ‘크다(大也)’, ‘편안하다(安也)’, ‘기쁘다(悅也)’, ‘무리’ 등으로 사용했다. ‘오랑캐 이’와 ‘오랑캐 리’가 따로 있었기에 오랑캐라는 뜻으로 사용사례가 없었다. 중국대국을 섬기기(事大)에 자신을 낮추는 ‘노객(奴客)’이라는 수준의 ‘오랑캐’로 스스로 ‘동이’라고 자칭함에서 시작되었고,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고 화친을 맺자는 것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으로 사용했다.

이에 앞서 공자(孔子, BC 551 ~ BC 479)는 동이족(선비족)을 모델로 선비의 6가지 품행(六藝)을 논어(論語)에서 제시했다. 이를 완비한 전인적 교양인이 선비(人備必需)였다. 이를 중화문화에서도 선비 사(士) 혹은 선비 유(儒)로 녹여내었다. 즉 학문의 기반 위에 육예(六藝)를 갖춘 사람을 선비라고 했다. 마치 플라톤(BC 427~BC 347)이 갈파했던 이데아(idea)를 구현하는 철인(哲人)이었다.

학문이란 5단계 과정학습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명변(明辯), 심사(尋思) 그리고 독행(篤行)이다. 오늘날 용어로는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이고, 당시 유행했던 용어로는 ‘산다는 건 배움의 연속이고, 배움이 참된 삶(生卽學繼,學卽眞生)’이라는 의미다. 이에 학생이라는 용어가 제사상 지방(紙榜), 시신을 덮는 관천판(棺天板), 묘비(墓碑), 사당의 혼백(魂帛) 등에 빠짐없이 적혀져 있었다. 여기 6가지 품행으로 예의(禮義), 음악(音樂), 사술(射箭), 기마(馬御), 서도(書藝) 그리고 전략적 계측(計測)을 갖춰야 했다. 선비란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아닌 나라가 위기를 맞으면 붓(목탁)을 놓고 칼을 잡았던 화랑, 승병, 의병, 학도생 등으로 민충(民忠)을 다했다. 또한 계측이란 손자병법의 ‘시계(始計)’ 혹은 36계 ‘묘산(廟算)’와 같은 전략이며, 국책(國策)이 없으면 백성들은 대책(對策)을 강구했다.

서지학측면(古書誌學側面)에서 선비란 말을 살펴보면, 1447년 발간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션•‘’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용비어천가 제66장 “선비를 경멸하고 꾸짖기를 잘해(輕士善罵)...”, 주변국의 언어 가운데 ‘지식이 있는 사람(학자)’의 뜻으로 몽고어 “사인바이(Сайн бай)”가 유입되었고 변천되었다.

선비의 성품과 품행에 대해 예기유행(禮記儒行)에서 언급했던 사항을 요약하면, i) 삶이란 곧 배움이라(學卽生, 生卽學)는 신조로 “선비는 널리 배움에 끝이 없고 돈독하게 행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조용히 홀로 지내더라도 정의로움(義)을 잃지도 방탕하지 않으며, 위로 통달해 가는데 곤혹함이 없으며, 예의(禮)를 지킴은 엄정하되 그 쓰임은 화합을 중히 여긴다.” 혹은 “선비는 금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으며, 충성(忠誠)과 신용(信用)을 중히 여긴다. 토지를 바라지 않고 의로움을 확립하는 것으로 터전(義基)을 삼는다. 많이 축적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배움이 많은 것으로 부유함(學裕)을 삼는다.”

ii)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생활화한다는 “그 거처는 사치나 분수에 넘침이 없어야 하고, 그 먹고 마심이 지나쳐서는 아니 되며, 그 과실은 가볍게 일깨워줄 것이요. 맞대고 따질 것이 아니니 그가 굳세고 떳떳함에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이며, iii) 행동거지에서 충성과 믿음을 옷(忠誠之衣)으로 한다는 “선비는 충성과 신용으로 갑옷과 투구를 삼고 예절과 의리로서 무기와 방패(干戈)를 삼는다.”

또한 iv)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진다(不怨天不尤人)는 “세상이 다스려져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세상이 어지러워도 가로 막으려하지 않는다. 모양이 같다고 해서 쉽게 어울리지 않으며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으니 그 특별히 확립된 홀로 행동함에 이와 같은 것이다.” 보다 쉽게 표현하면 “과오를 고침에 꺼리지 않았으며, 다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過勿憚改,異卽歡容).”

◇진리는 나의 빛(Varitas Lux Mea)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사례로, 가난한 선비 남편의 학업에 뒷바라지를 하고자, 아내(馬氏婦人)가 품삯으로 받은 겉보리를 말리려고 보리멍석을 열어놓고 남편에게 비가 오면 덮어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날품을 팔려갔다. 소낙비가 쏟아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집에 와보니 우케멍석의 겉보리가 다 떠내려갔다. 아내는 이런 남편 믿고 살다가는 굶어죽기 좋겠다고 마음을 바꿔먹고 재가(再嫁)했다. 그 뒤 보리가 떠내려가도 경전에 일념(漂麥)했던 강태공(姜尙, BC 1211~BC 1072)은 제(齊)나라 제후(諸侯)가 되었다. 재가(再嫁)했던 아내가 다시 아내로 맞아달라고 애원하자,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若能離更合,覆水不返盆).”는 인연을 설명했다. 그런 선비를 두고 “궁색한 80년을 살아도, 뒤늦은 80세에 영광을 얻는다(窮八十, 達八十).”는 선비의 모델을 제시했다. 보리멍석이 떠내려가도록 학문에 전념했던 후한(後漢) 남양(南陽)의 고봉(高鳳)이라는 선비도 있었다. 그는 가업인 농사일은 돌보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열중해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선비의 학문은 i) 단순하게 박학(博學)하게 배워서 입신양명에 한정되지 않고, ii) 동시에 문제발견의식과 문제해결방안(審問)을 강구하며, iii) 사실과 실재를 터전으로 명확한 판단(明辯)을 통해서, iv) 자신과 주변인들의 건전한 사고전환(尋思)과 혁신을 초래한다. v) 배운 사람답게 독실하게 실행(篤行)하는 전인적 교육을 말했다. 이런 실용적인 교육은 1897년 미국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교육가인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교육은 삶의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Education is not preparation for life; education is life itself)”라고 제창되었다. 기원전 우리의 선조인 선비들이 외쳤던 배움은 삶이고, 삶이란 배움이다(學卽生, 生卽學)라는 개념이 되살아났다. 1950년 유엔 유네스코(UNESCO)에선 ‘평생학습연구소(Institute for Lifelong Learning)’가 설립되었고, 지구촌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원인 인적자원(human resource)을 개발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이런 평생교육이란 개념마저도 대학에선 편협된 진리탐구에만 한정되었다.

통시적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옥스퍼드대학교(Oxford University)에선 ‘주(主)는 나의 빛이시니(Domunus Illuminatio Mea)’라는 모토로 교육을 했다. 이는 시편27장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러워하리오(Dominus illuminatio mea et salus mea: quem timebo)?”에서 인용되었다. 또한 1643년 하버드대학은 진리 탐구(Veri Tas)를 모토를 삼았고, 1746년 예일대학(Yale University)은 빛과 진리(Lux et veritas)로 정했다.

우리나라 서울대학교가 ‘진리는 나의 빛(Varitas Lux Mea)’으로 한 건 1946년이었다. 배움을 빛에 비유해서 ‘어둠을 밝히는 등불(暗夜明燈)’, ‘배움의 등불(學燈)’, ‘배움으로 덕행과 존엄을 밝힌다(學明德尊).’ 혹은 ‘세상을 비추는 밝은 등불(照世明燈)’이라는 표현을 했다. 뿐만 아니라 AD 400년경에 저술된 능가경에선 “거대한 학문의 길엔 어떤 문이 없다(大道無門)”. 송(宋)나라의 혜개선사(慧開禪師, 1183~1260)는 1228년에 출간한 ‘무문관(無門關)’에서 “큰 길에는 문이 없으니 갈래 길은 천이로다. 이 빗장을 뚫고 나가면 하늘과 땅을 홀로 걸어가리라(大道無門,千差有路.透得此關, 乾坤獨步).”고 갈파했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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