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선인장과 나팔꽃
만세선인장과 나팔꽃
  • 승인 2021.10.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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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

짧아서 금세 떠날 것만 같아 아쉬운 가을, 김대규 시인의 ‘가을의 노래’를 가만히 불러본다. 구구절절 참 이심전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누군가 보고 싶고 세상 모든 것들이 황혼으로 보인다는 건 내 마음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가을이라 그렇다는 시인의 시가, 깊어가는 가을 ‘가을앓이’를 앓고 있는 모든 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더해준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미명의 새벽을 일으켜 세운다. 노크 한번 없이 쾅쾅쾅 막무가내로 쳐댄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 대못을 치듯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앙칼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깨 위에 반쯤 옷을 걸친 채 현관문의 고리를 풀어내려는 그 순간, 반쯤 열린 문을 비집고 날벼락이 들이친다.

“골목에 내놓은 쓰레기 좀 치워요. 나는 더러운 꼴을 눈 뜨고는 못 보는 사람이라, 알겠어욧!”

아침 댓바람부터 밑도 끝도 없이 쳐들어와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구토하듯 퍼질러 놓고는 쌩, 가 버린다. 다리가 떨리는지 후들후들 계단을 내려서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자리 그대로 얼음이 되어 서 있었다.

어저께, 다리가 망가진 의자 하나를 내놓았었다. 스티커를 붙이고 재활용폐기물 신고를 마친 후, 언제 데려갈지 기다리던 중이었다. 가을이라 대청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수거해야 할 물량들이 줄을 섰다며 업체로부터 좀 더 기다려 달라며 이해를 구했었다. 그러한 사정을 알 리 만무한 그녀가 골목을 오가며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 많은 이웃 중 하필 왜 나였을까. 어떤 맘으로 그 쓰레기를 내놓은 장본인이 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앞집과 뒷집, 이웃이란 인연으로 살아 온 지 몇 해가 지나도록 그녀와 난,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는데….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볼 새도 주지 않았다. 우리 집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난 뒷문을 열면 그녀의 안방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먼지 한 톨, 낙엽 한 잎 거처할 자리가 없을 만큼 그녀의 마당은 여유가 없어 보인다. 낮 동안,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는 빈집 같다가도 궁지에 몰린 듯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마리의 애완견이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어대면 그녀가 집에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출근인지 퇴근인지도 모를 그 저녁, 매번 같은 시간 그녀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강아지들을 앉혀놓고 매타작을 하는 듯 보였다. 무릎 꿇린 강아지들에게 하는 말은 늘 한결같았다. 딱 두 마디였다. ‘왜 똥을 아무 데고 싸 놓는 것이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으냐’는.

그녀와 나는 반쯤 열린 흐릿한 창문을 사이에 둔 채 몇 번이고 그 장면에서 두 눈을 마주치곤 했다. 동물학대로 신고를 해야 하나 어쩌나 발을 동동 굴리던 내 모습을 읽었는지 그녀는 그때서야 들었던 매를 내려놓곤 했었다.

얼마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너무 좋은 이웃을 만나 올려요’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난다. “아기가 쿵쾅거리고 주말마다 친구들이 놀러 와 시끄럽게 하는데도 한 번도 올라오지 않고 오히려 ‘애들은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인자하신 말씀에 감동 하였어요”라는 아이 엄마의 손편지를 받은 아래층 할아버지는 “○○엄마, 이름이 너무 정겹네요. 매번 감사합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늙은이에게는 시끄러움도 위안이 된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화답을 보냈다는 따뜻한 얘기다.

“산 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눈뜨자마자 화두처럼 들춰 읽었던 시를 맘속 깊이 뿌리 내려 본다. 작은 화분 속 세상, 납작하고 울퉁불퉁한 모양이 꼭 타이어가 밟고 지나간 것 같아서 로드킬 선인장이라고도 불리는 만세선인장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이 눈에 담긴다. 이웃사촌이라는 적정온도를 나눠 가지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가을을 엮어가고 있다. 서로에게 상처는 줄 수 없다는 듯 가시는 안으로 삭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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