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과적
이미, 과적
  • 승인 2021.11.0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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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골목을 들어서는데 봉고차 한 대가 내 앞에 선다. 유치원 셔틀버스다. 문이 열리고 노랑 은행잎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차에서 내린다. 선생님과 마주 서서 배꼽인사를 나누는 사이 기다렸다는 듯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향해 달려든다. 등에 멘 가방을 벗겨 대신 들어주는 일부터 가방 속을 뒤적이며 이것저것 간섭하는 엄마도 있다. 그저 '반갑다' 어깨 한 번 쓸어주고 '애썼다'며 등 한 번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안아주면 될 걸. 뭐 그리 바빠 아이를 보자마자 그러는지, 아쉬운 맘 한 자락 남겨둔 채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고함이 들린다.

"버려"

돌아보니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재촉하고 있다.

"버려, 버리라고, 버리면 되잖아 제발"

무엇을 버리라는 건지, 또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을 뒤로한 채 돌아서 왔지만 며칠째 그 말이 지워지지 않고 여운으로 남아있다. '버려' 그 말은 오랫동안 집안 곳곳을 기웃거리게도 하고 내 삶을 서성이게 했다.

새벽 네 시,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그가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놀라 벌떡 잠에서 깬다. 처음 눈 떴을 때 바로 일어났어야 하는데 오 분만 더, 십 분만 더 하다가 그만 늦어 버렸다며 투덜투덜 댄다. 한 발 집어넣고 물 한 잔 들이켜고 또 한 발, 마저 바지 속으로 구겨 넣으며 화장실로 간다. 한쪽 팔 끼우며 담배를 챙기고 나머지 한쪽 팔을 쑤셔 넣으며 휴대전화기를 챙긴다. 외투를 걸치면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힌 채 세상 속으로 불려 나간다. 신발을 끄는가 싶더니 구둣주걱으로 부은 발을 겨우 욱여넣으며 겅중겅중 징검돌 밟듯 뛰어나간다. 제 한 몸 바로 서기도 힘에 부치는 나이인 듯 지칠 만큼 지친 그는 몸도 맘도 이미, 과적이다.

그가 잠든 사이 잠 오지 않아 텐트며 코펠을 정리하기로 했다. 코펠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정성을 들였는지 모른다. 그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 코펠이 놓여있는 진열대 앞을 또 얼마나 서성거렸는지도. 지금처럼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었다. 매달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 몇 달을 모은 후 살 수 있었다. 자가용이 없던 신혼 시절, 주말이면 언제나 배낭을 등에 지고 두 아이는 품에 안고, 들로 산으로 방방곡곡 헤매고 다녔었다. 코펠은 그렇게 어른이 된 두 아이가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여행을 함께 해 준 삶의 동반자였다.

코펠을 내다 놓으며 천상병 시인의 '소풍은 끝났다'를 떠올렸다. 몇 겹으로 들앉은 코펠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낸다. 저희도 버려진다는 걸 안다는 듯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수런대는 소리에 맘이 스친다. 결혼한 지 서른두 해 만에 결국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내 손을 떠나는 것이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 재활용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리에 코펠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남편이 내 손을 낚아챈다. 그제야 그의 눈에 들었는지 놀란 듯, 구원 투수처럼 한 소리 냅다 던진다.

"와 버리노! 아직 멀쩡하구만"

못 들은 척 퉁명스럽게 내가 대답했다.

"버릴 만하니 버리지. 다시 언제 사용할지도 모르고, 갖고 있어 봐야 더는 쓸데도 쓸 일도 없는데. 당신, 기억나나. 텐트 쳐 본지가 언젠지"

느닷없는 질문에 멋쩍었는지

"그래도, 하필 코펠이고. 이 나이쯤 되면 다른 것들도 버릴 게 천지일 텐데"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리고 살기로 했다는 나의 뜬금없는 대답에 그가 또 묻는다. "근데 왜 코펠이 첫 번째란 말이고"

"처음이고 끝이고 간에, 더는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거지. 다 품어 안고 있으면 우짜노. 때가 되면 놔 줄 줄도 알아야지.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성할 때 보내줘야 하는기라. 누군가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게"

그를 배웅하고 들어선 계단마다 감잎이 떨어져 한가득하다. 아침저녁으로 쓸고 쓸어내도 마당 가득 쌓이는 낙엽들. 비를 들고 쓸다 말고 그냥 두기로 한다. 더 내려놓을 것이 없을 때까지 지켜보기로 한다. 그토록 원했던 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면 버려야 하는 것처럼 좀 더 가벼워질 때까지. 감나무든 삶이든. 이 가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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