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기적 같은 날들이여, 오라!
[백정우의 줌 인 아웃]기적 같은 날들이여, 오라!
  • 백정우
  • 승인 2021.11.2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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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의 부모가 걷는 여정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의 부모가 걷는 여정을 보여준다.

 


고등학교 시절, 목소리부터 행동거지까지 영락없이 여자인 녀석이 있었다. 친구들은 호모라고 놀리기 일쑤였다. 70년대 대부분이 그랬듯 나 역시 호모가 뭔지 몰랐다. 그 친구를 도와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생각해 본 일도 없다. 내가 호모포비아(homophobia)는 아니었지만, 동성애에 관심을 가진 건 영화평론을 하면서부터다. 영화가 훌륭한 선생님이 된 셈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을 향한 폭력과 차별은 그것이 당연한 처사라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이성애만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법적 성별만이 정상이고 상식이라 믿는 비뚤어진 생각. ‘차이가 차별의 준거’가 되는 셈이다. 주류집단은 타자화 시킨 대상에 대해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차별의 논리의 정당화하였다.

“극영화는 세상의 중심에서 할 말을 다하고, 다큐멘터리는 세상의 끝에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앙드레 바쟁의 말이다.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삶의 양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매체 중에서도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매력은 형언할 길이 없다. 뚝심 있게 바닥까지 내려가 길어 올린 둔중한 메시지로 뒤통수를 내리치는가하면, 사랑스런 얼굴로 따뜻한 삶의 풍경을 속살거리기도 하는 것. 다큐멘터리만의 매력이다. 반면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거나 앞뒤 안 가리고 감정을 헤집고 들어오려고 할 때, 거부반응이 생길 수도 있다. 때문에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촬영과 편집기술의 발전과 맞물린 ‘설득의 미학을 실천한 시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의 부모가 걷는 여정을 보여준다. 에둘러 말하고 싶지 않다. 정말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영화이다. 한결과 예준 두 아이는 각각 성전환과 동성애자이다. 영화는 소방공무원과 항공승무원인 둘의 부모가 자식들의 커밍아웃을 접하고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마침내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맞서기까지, 변화의 과정을 그린다.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 높여 고함치지도, 억지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기쁨과 애환을 여과 없이 보여줄 뿐이다. 작위적이지 않은 구성임에도 관객의 풀어진 마음과 촉촉해진 눈시울을 통해 할 말을 다한다.

성소수자 본인이 아닌 부모를 주요인물로 삼은 점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한 영리한 기획이다(다큐멘터리집단 ‘연분홍치마’의 장기이기도 하다.) 즉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 대신 그들을 보듬는 사람들과 연대의 힘을 앞세운다. 암울한 현실 속에 단비 같은 군산지법 판사의 친밀하고 다정한 목소리와 만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려움이 많겠지만, 당당하게 살아가세요” 성전환 여성의 대학입학 좌절 소식 앞에서 (세상이 이토록 완고하다면)홀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아이 옆을 지켜주겠다는 엄마의 술회 대목에 이르면 누구라도 억장이 무너질 것인 즉 균형과 미덕의 다큐멘터리란 이런 것이다.

혐오와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 마음에 작은 변화의 파동을 일으킬 빼어난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교조적이지 않아 개운하고, 신파로의 유혹을 초월한 의젓함이 당당하고 유쾌하다.

여자가 되고 싶은 씨름부 사내아이의 분투를 그린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주인공 동구는 말한다.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성정체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자존과 존엄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놓치고, 외면하고, 부정해온 것들 말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관객과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당장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교정하거나 그들의 삶에 즉각적으로 도움 되진 않을지라도 큰 울림을 동반할 무엇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관객의 입을 통해 작은 변화의 첫 발을 내디딜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의 진일보. ‘너에게 가는 길’이 한국사회의 차별적 프레임을 통과하고 관객과 당당하게 마주하는 그 순간. 기적 같은 날들이여, 부디 우리 앞에 오라!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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