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 이야기] 그 옛날, 우리 민화는 이미 ‘비스포크’였다
[박승온의 민화 이야기] 그 옛날, 우리 민화는 이미 ‘비스포크’였다
  • 윤덕우
  • 승인 2021.12.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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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포크 시대
단어의 유래
영어 숙어 ‘be spoken for~’
‘말하는 대로·주문에 따라’ 의미
소비자 맞춤 생산 시스템 뜻해
자유분방한 민화
전통 벗어나 개인 취향 고려
원하는 사이즈·색 골라 제작
일반 서민들 의식·정서 반영
화조도-국립민속박물관
화조도 8폭 병풍 작가미상 19세기 지본 채색 각26X67.3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화조도초본
민화 초본집과 화조도 초본 조선시대,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이제 2021년도가 한 달 정도 남았다.

이맘때쯤에는 매년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소비 트렌드를 예측하는 보고서가 나온다. 이름하여 ‘트렌드 코리아 2022’이다.

내년 2022년도 제시된 우리나라 트렌드 키워드는 TIGER or CAT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는 책의 서두에서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아 10개의 키워드 두운을 ‘TIGER OR CAT’으로 잡았다”며 “거침없이 포효하는 호랑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찌그러져 쥐나 잡는 고양이가 될 것인가. 검은 호랑이처럼 힘차게 포효하는 2022년이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

필자는 내년 첫 번째 트렌드 키워드에 ‘나노사회’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 민화와의 관계를 알아보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나노(Nano)라고 하면 아주 작은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제 우리사회가 공동체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향과 트렌드의 미세화에 따라 사회 인프라와 유통이 세분화된다는 것이다.

요즘 TV광고를 보면 이미 이러한 트렌드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비스포크’ 아마 독자들에게도 생소한 단어는 아닐 것이다. 가전제품부터 화장품 심지어 안경에도 비스포크라는 단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비스포크’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본래의 의미는 맞춤 정장을 뜻한다.

어원에 대해선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비스피크(Bespeak)’라는 영어의 동사에서 왔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비스포크라는 단어는 1583년에 발간된 영국 옥스포드 사전에 처음 등장했는데, ‘비스포크(Bespoke)’란 ‘말하는 대로’‘개인 주문에 따라 맞춘’이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be spoken for(~에 대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비자가 ‘말하는 대로’ 제작해 주는 맞춤형 생산 시스템인 것이다. 디지털 세대에게 친숙한 언어로 변환하자면 ‘사용자 정의’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매장에서 구입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과거 제조업은 모두 비스포크 방식이었다. 언뜻 새롭게 들리지만 맞춤형 양복, 맞춤형 구두가 있는 패션업계에서는 보편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비스포크(Bespoke)’ 방식을 우리 생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OTT(Over The Top,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 업계의 절대강자인 유튜브와 넷플릭스, 왓차 등은 고객에게 딱 맞는 영상들을 추천하는 맞춤형 추천알고리즘으로 매출을 극대화하고 있다. 바이브, 멜론 등 스트리밍 서비스 업계에서도 ‘비스포크’ 방식으로 고객 취향의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 중이다.

그런데 그 맞춤 서비스가 오래전 우리 민화에는 벌써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들 민화는 본그림이라고 한다. 아니 우리 그림 자체가 그 시작은 본이었다. 본그림은 우리그림의 재생산 방법이자 변주, 확장하는 원리를 담고 있다.

본그림을 통해 미술교육이 이루어지고, 본그림을 바탕으로 복잡, 단순화라는 변주가 이루어지며, 그림을 소장하고 싶은 사람의 요구에 맞게 변형도 이루어져 여러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궁중회화를 담당했던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은 모두 본그림을 이용해서 창작을 했다.

지전(紙廛)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화공들도 본그림으로 수 만점의 그림을 그려 팔았다. 전문적인 미술수업은 모두 본그림을 베껴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민화는 전통회화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잡화, 속화라는 명칭으로 천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과 형식에 속해 있지 않았기에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자유롭고, 독창적인 자기 양식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개인의 취향과 정서에 맞닿는 자유분방한 형식미를 창출하고 있다.

그래서 본그림을 빼고 우리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자는 이 본이 그 옛날 우리 그림의 비스포크였다고 생각한다.

민화(民畵) 라는 단어에서도 백성들에 의해 백성들의 요구로 그려진 그림이라 는 뜻이니 오늘날의 비스포크와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민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배경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엄격한 유교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었고 청나라의 영향으로 재력을 갖춘 상공인들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조공무역과 중개무역에 따른 경제발전 따위가 바탕이 되었다.

아무튼 민화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가 계급계층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가 낳은 놀라운 미술의 걸작, 즉 민화는 꾸밈없이 살아온 서민의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구입하고 좋아한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 아님은 분명하다.

민화는 떠돌이 화가나 지방의 그림쟁이들은 누구나 그림 초본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림을 소장하고 싶은 사람은 그 초본집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화제를 고르고 자신의 집에 맞는 사이즈와 색을 맞췄을 것이다. 이렇듯 민화는 서민들과 함께 한 그림으로써,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고, 민간으로 확산되어 갔던 장식 그림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궁중회화와 선비그림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삶의 원초적 욕망을 거부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싶은 것들로 화면을 채웠다.

최근 몇 년 사이 산업 전반은 물론 우리 생활에서도 ‘비스포크(Bespoke)’가 눈에 띄게 등장한다. 국내 대표 가전회사에서 맞춤형 냉장고를 처음 출시한 이래,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올해는 냉장고를 비롯해 세탁기, 정수기, 건조기 등 20여종의 생활가전제품을 맞춤형으로 출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제는 양복이나 셔츠를 맞추는 것처럼 이사 또는 리모델링 시 가구와 더불어 거주공간과 본인의 취향에 맞는 가전제품을 맞추러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더욱이 코로나 시대로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비스포크(맞춤형) 가전제품은 인테리어에 보다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고, ‘비대면 뉴노멀’시대에 각광받는 존재가 되었다.

TV광고를 보다가 광고 카피에 “모두에겐 자신만의 BESPOKE가 있다.”라고 끝난다. 살짝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화면 속 전자 제품을 꼭 사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우리 그림에도 화가가 그랬든, 그림을 소유한 사람이 그랬든, 그들만의 소망과 욕망, 그리고 다른 분야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비스포크가 되기를 바란다.

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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