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겨울나기
  • 승인 2021.12.0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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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세심하게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십이월이다. 강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에서 질긴 생명력을 본다. 주방 뒤쪽 창고에 웅크리고 있는 보일러가 신호를 보낸다. 전국에 걸쳐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예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기름이 바닥이 났어요. 얼른 오셔서 가득 채워 주세요.”

십이월은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다. 넉넉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느긋하게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 있지만, 도시 생활자들에게 월동준비란 늘 코앞에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연례행사다. 주머니가 텅 비어 있으면 먹고 싶은 것도 더 많아지는 법이라며 엄마는 손이 큰 나를 타박하기 일쑤다. 남에게 퍼 주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아버지를 닮아 헤프다며 가난한 사람에겐 여름보다 겨울나기가 더 힘들고 고단한 일이니 알뜰살뜰 아끼며 살라 당부하곤 한다. 생각해보니 늘 이맘때면 창고 가득 쌀이며 연탄을 채우는 것으로 월동 준비를 해 두었었다.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운 기사님이 말을 건네 온다. ‘요즘 들어 더욱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며 울상이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나를 보더니, 큰소리로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름보일러 대신 도시가스로 거의 바뀌었잖아요.”

“어머나, 그럼 길냥이들은 어떻게 살아요?”

순간 길냥이들이 떠올랐다. 당혹스럽다.

우리 집 식탁 밑에는 밥그릇이 세 개 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또 두 개의 밥그릇이 있다. 내가 고양이들을 위해 챙겨야 하는 밥그릇은 총 다섯 개가 되는 셈이다. 집 안에 있는 고양이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키우게 됐지만, 사람보다 수명이 짧아 벌써 그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에 비해 문제는 동네 근처를 배회하는 길냥이다. 도시의 길냥이들은 먹이 사냥이 거의 불가능한 척박한 현실에 처해 있다.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이 든다. 또한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신장이 망가지는 비뇨기질환인 신부전에 곧잘 걸리곤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물을 자주 먹어야 하는데 도시에는 그 흔한 물조차 맘 놓고 먹을 곳이 없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무게는 1g 정도라 한다. 이 초경량의 물방울이 누군가를 휘청거리게도 하고, 때론 감동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측은지심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냥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주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겠지만, 내겐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일이 그들에겐 죽고 사는 일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일일 것이다. 밥그릇을 책임진다는 것,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처음 몇 날은 그들의 눈빛을 애써 외면 해 보았다. 그러기를 여러 날 굶주림에 지쳐 애태우는 그들을 보듬기로 했다. 그렇게 난 본의 아니게 캣맘이 됐다.

안과 밖, 다섯 마리의 고양이 밥값 앞에서 매번 죄책감에 시달린다. 특히 밖에 있는 그들의 밥을 고를 때면 싸고 가격 대비 양이 많은 것으로 달라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이왕 책임지기로 한 것이니 끝까지, 오래 그들의 밥을 챙기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아 봐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미안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숲도 사라지고 없는 도시에서 혹한이 밀려든 겨울밤이면 그들은 지하 보일러실에서 추위를 견디곤 한다. 그런데 가스보일러로 바뀌면 기름을 공급하는 기사의 생계가 힘들어지는 것만큼이나 그들도 겨울나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이다. 이 겨울에 느끼는 체감 온도는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동일할 것이다. 비록 길냥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한 배고픔도 목마름도 추위도 느낄 테니까. 오늘도 앞집 할머니가 담벼락 너머로 소리를 지른다. ‘재수없게시리’ 길고양이 밥을 챙겨 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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