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
밥심
  • 승인 2021.12.19 17: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밥 한 그릇에도 마음이 깃들어 있다.

하늘을 찌르는 아파트 건물들 사이에 끼인 주택가 골목을 들어선다. 계단 옆, 가장자리를 지키고 선 감나무 한 그루가 붉은 등불을 밝혀 놓은 듯 몇 알의 까치밥을 차려 놓았다. 몇 날 며칠 차려진 그대로 매달려 있다. 서둘러 먹지 않으면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 위기에 처해 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새들의 안부가 궁금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지켜보는 마음이 조마조마 애가 타들어 갈 즈음 어딘가에서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기를 여러 날, 까치 한 마리 날아든다. 다리엔 하얀 마스크가 깃발처럼 칭칭 동여매진 채 펄럭이고 있다. 반이 잘려 나간 듯 보이는 부리로 반도 채 남지 않은 감을 겨우 쪼아 먹는다. 순간 코끝이 찡하다. ‘새들도 인간처럼 밥 먹고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남주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다 먹고 날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뒤로 하고 남은 몇 칸의 계단을 마저 오르며 ‘다행이다. 죽지 못해 살더라도 살아있으니….’ 맘속으로 조용히 기도드린다.

“얼른 이 속으로 들어와라”

발을 동동 구르며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언제나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을 들추면서 말하곤 했다. 김밥 속 단무지처럼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면 매서운 바람이 불던 창밖 풍경이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하게 보일 정도로 얼음장 같던 온몸과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불을 덮어쓴 그 자세 그대로 비몽사몽간에 밥상 앞에 앉으면 코에 확 끼쳐오던 밥 냄새가 어쩌면 그리도 고소하던지, 세월이 더해질수록 코끝에 진하게 배여 온다.

밥이 다 똑같은 밥인 줄 알았다. 밥 한 끼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그릇의 밥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보약이 될 수도 죽일 수 있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수십 년 동안 밥을 퍼 주면서 풀 때마다 깨 닫는다.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한정록(閑情錄)’에서 밥상 앞에서는 반드시 그 음식에 들어간 공력(功力)을 생각하라고 이른다.

“음식은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거두어 빻고 물에 씻은 다음 끓여서 만든 것이니 노력이 많이 들고, 한사람이 먹는 것은 열 사람이 수고한 결과이다. 어릴 때는 부모가 심력을 다해 이룬 것을 먹는 것이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든 것을 먹는 것이니 더 말할 게 없다.”

같은 음식이라도 맛과 의미가 다르다. 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야 온전히 몸을 부지할 수 있듯 약이나 건강식품을 챙겨 먹는 마음으로 음식을 대한다면 밥 한 그릇이 보약 한 첩이 될 수도 있으리라. 만드는 사람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법정 스님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복은 어느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새해에는 복을 많이 지으십시오”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나 역시, 주걱으로 밥을 풀 때마다 제를 지내듯 기도를 올린다. ‘이 밥 배불리 먹고 세상사 힘든 일 술술 풀리기를, 그리고 복 지으시기를….’

‘보시’란 말이 생각난다. 널리 베푼다는 의미로서,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세속의 명리(名利)를 위해서라든가 어떤 반대급부라도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면, 그것은 부정(不淨)보시가 되므로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누군가의 허기진 뱃속을 달래주는 일이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보시가 아닐까.

‘내일은 어떤 복을 지을까’를 고민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영화 같은 인생을 사시느라 수고가 많다. 그래도 우리 모두 절망치 말고 고구마를 심을 곳에 민들레가 나도 껄껄 웃으면서 살아가자. 어차피 끝내는 전부다 잘 될 테니 말이다’ 배우 박정민 작가의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의 한 구절을 들려준다. 고구마를 심은 곳에 민들레가 난다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민들레는 내가 심지 않았는데 그냥 자란 것이고 곧, 내가심은 고구마 싹이 올라올 것이니까.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내가 이룬 것들과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일들을 천천히 둘러보아도 좋을 한 해의 끝자락이다. 뜨끈뜨끈한 아랫목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 한 그릇의 고소한 향기에 젖어보는 겨울 저녁, 달이 고봉밥처럼 떠올라 허기진 세상을 따시게 데우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