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사내들이란, 참
[백정우의 줌인아웃]사내들이란, 참
  • 백정우
  • 승인 2021.12.2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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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듀얼스틸컷
‘라스트 듀얼’스틸컷.

1834년 함부르크에서 잘생긴 젊은 장교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남작은 같은 장교인 롭 남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롭이 트라우트만스도르프의 콧수염이 빈약하고 생기가 없다면서, 이는 그의 수염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라는 시를 써 친구들에게 돌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사실은 폴란드 장군의 매력적인 미망인 로도이스카 백작부인에게 두 사람 모두 연정을 품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명예 유지는 남성의 일차적 관심대상이었고, 상대로부터 받은 모욕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불명예로 여기기 마련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1차 세계대전까지 세계도처에서 벌어진 명예와 관련한 결투의 역사가 이를 반증한다. 이런 와중에 남성의 명예회복 과정이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어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남자들의 그릇된 명예욕과 자존심은 그 아래 짓밟힌 여성의 신음소리를 행진곡삼아 진군해왔다. 이것이 인류역사를 관통하여 영화 속으로 이동하게 되면 더욱 강화된 형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니, 2021년 가을 리들리 스콧이 내놓은 ‘라스트 듀얼’ 또한 그러하다.

배경은 14세기 후반. 함께 전장을 누비던 친구 장과 마크는 재산과 권력분배 문제로 갈라서고 반목하더니 급기야 마크가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강제로 범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는 명예회복을 위한 장의 상소에 따른 마크와 장과 그의 아내 각각의 진술에(각자가 진실이라 말하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30년 전 서부에서 동부로 횡단하는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 ‘델마와 루이스’로 여성영화의 정점을 찍은 리들리 스콧은 거장의 귀환을 선포하듯 ‘라스트 듀얼’에서 다시 한 번 여성을 우뚝 세운다. 결투로 진실이 결정되는 시대,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하던 시대, 권력과 가문의 명예가 여성을 딛고 선 야만의 시대를 마르그리트가 보여준 용기와 강단으로 격파한다.

영화에서 내가 주목한 건 2시간 32분이라는 장대한 러닝타임을 마무리하는 “마르그리트는 30년간 영지의 안주인으로 번영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뒤이어 화룡점정을 찍는 “재혼은 하지 않았다.” 라는 마지막 자막이다. 리들리 스콧은 마르그리트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 말로 152분간의 서사를 압축 완성시킨다. 곧 감독의 속내다. ‘라스트 듀얼’은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는 영화가 아니다. 아내의 치욕을 복수하기 위한 남편의 사랑과 전쟁도 아니다. 마르그리트의 말처럼 오직 카루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원수와 싸우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아내의 목숨을 건 허영에 눈 먼 남자와, 권력으로 모든 걸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난봉꾼 사이에서 벌이는 여성의 외로운 투쟁이다. 각자의 진실 주장에 공평하게 시간을 배분하는 척 균형을 유지하다가 마르그리트의 손을 들어주더니, 마지막 한 줄로 남성주의의 허상을 여지없이 박살내버리는 통쾌함이라니!

영화가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시작부터 공언했듯이 장담컨대 마르그리트는 재혼하지 않았을 거다. 역설적으로 혼자였기에 30년간 번영하며 행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일 터. 흥미롭게도 바로 이전 진술은 이러하다. “카루주는 몇 년 후 십자군전쟁에서 전사했다.” 사내들이란, 참.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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