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더 블루, 이원동 개인전
갤러리 더 블루, 이원동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2.01.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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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 같은 시선·섬세한 濃淡으로 만든 수묵의 세계
돌가루에 아교 섞고 부조 만들고…
해마다 새 화풍 개척 ‘파격적 행보’
같은 방향으로 그리면 안되는 난초
금기 깨고 ‘먹 조절·구도’로 승부수
이번 전시에선 전통기법 복귀
사군자·산수화 등 130여점 선봬
이원동 작
이원동 작.

눈발은 휘몰아치는데 붉디붉은 홍매(紅梅)는 서릿발에 걸린 달처럼 고고(孤高)하다. 차가운 겨울을 견디고 피워낸 핏빛의 아름다움… 일생을 추위와 맞설지언정 결단코 향기를 팔지 않겠다는 지조가 차가운 눈발을 뚫고 꽃을 피워낸 강단에서 말미암았으리라.

이원동은 눈발 속에 피어난 홍매(紅梅)의 고고한 자태를 단숨에 낚아채 한지에 먹으로 그려낸다. 호흡을 멈추고 생동하는 기운으로 표현된 작가의 작품 앞에서 “얼쑤!”하는 감탄사가 무의식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다. 귀가 솟구치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감응(感應)하는 육감(六感)의 매혹이다.

대구 갤러리 더 블루(푸른병원14층)에서 18일부터 열리는 석경(石鏡) 이원동 개인전 제목은 ‘바람의 흔들림 속에도’이다. 사군자와 산수화를 포함해 수선화·붓꽃·포도·홍시 등 130여점을 건다.

◇ 파격으로 점철된 화업 50년

석경의 화업 50년은 ‘수묵화의 정석’에 대한 도전으로 점철됐다. 분쇄한 돌에 아교를 섞어 석경표 석채(石彩)를 제조하고, 한국화에서 보기 드문 부조(浮彫) 제작하고, 해마다 새로운 화풍 소개하는 등의 행보를 걸으며 전통수묵의 파격을 주도했다.

한 곳에 시선이 50년이 머무르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새삼스럽게 된다. 집중한 시간에 비례한 만큼 대상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경은 달랐다. 50년간 자신을 지배했던 고정 관념이나 습(習)에 기대려는 태도로부터 선을 그었다. 안락한 답습보다 거친 도전을 선택한 것. 석경이라고 기득권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나. 그러나 석경은 그것보다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고 싶었고, 이에 따라 그의 화업은 필연적으로 파격과 변화로 점철될 수 밖에 없었다.

“옛 것을 답습하며 정체된다면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진정한 예술가는 늘 새로운 것에 목마른 법이죠.”

◇ 파격에서 전형으로 회귀

이번 전시는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격과 무관하다. 파격보다 전통을 따랐다. 한지에 붓과 먹으로 사군자와 산수화를 전통기법으로 그렸다. 수묵담채였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전통수묵화로 되돌아온 것. 수많은 재료를 개발하고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면서 창작의 희열을 맛봤지만, 어느 순간 “이 또한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묵화의 정석으로 회귀했다.

“고전적인 전통수묵화로 현재의 시대정신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작가로서 직무유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회귀의 출발이었다. 그가 “전통수묵화를 그리지만 나는 조선시대가 아닌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냐?”며 반문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몸에 우리 시대의 미적 감각이 장착되어 있을 것이고, 전통 재료와 소재로 표현해도 충분히 현재의 미적 감각으로 시대정신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전통수묵화로 승부수를 던지겠다”고 결심했을 때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스물 아홉 번의 전시를 진행해 오면서 축적된 경험들이 어떤 형태로든 수묵의 현대적인 미감을 재발견하는 일에 관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해 왔던 작업이 수묵의 현대적 재해석이었기 때문에 전통수묵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내 안에는 현대인의 미적 감각이 스며 있다고 봤어요.”

◇ 현재성으로 전통수묵의 진부함 극복

그의 수묵에서 현대성은 두 지점에서 발견된다. 먼저 사군자나 풍경의 단면을 근경으로 당긴 것이 그 첫 번째다. 수묵화는 대개 원경, 중경이 중심이 되는데, 그는 과감하게 근경의 단면을 뚝 잘라 화면으로 끌고 왔다. “전통수묵화의 구도보다 한 참 더 나갔어요. 그랬더니 아주 현대적인 그림이 되었어요.”

석경 수묵의 또 다른 현대성은 ‘비워내기’다. 욕심을 버리고 낮은 자세로 마음을 비웠다. 그 무욕(無慾)의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반영됐다. 그러자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가 “진짜 욕심을 버리고 툭 툭 던져서 그렸다”고 했다. 욕심을 비워낸 대나무나 난초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에는 수선스러움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담백함만이 존재감으로 드러난다.

난초를 그릴 때 같은 방향으로 선을 그리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조형적인 멋이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경은 금기 또한 가볍게 넘는다. 하늘로 뻗어가는 난초의 네 줄기가 같은 방향을 향한다. 그가 “농담과 조화의 결과”라며 “먹의 농담을 조절하면 선의 방향이 한 곳으로 향해도 조화로운 구도로 이끌어 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조화로운 상태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죽이고 상대를 받쳐주는 태도다. 작가는 선(線) 하나 하나에 충실을 기하는 방식으로 매화나 난초를 구성하는 선들 사이의 조화를 구축해간다. 그는 “의도적인 배려가 진정한 선인가?” 자문하며 각자의 역할론에 강조점을 찍었다. “누구를 배려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요. 평생 배려할 수 없으니까요. 조작적인 배려의 한계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2-이원동 작
이원동 작.

전시작인 13x60cm 규모의 작품 100여점은 특히 현대인의 주거 공간과 찰떡궁합이다. 대상을 클로즈업해서 단면을 그린 작품이다. 대작으로 그대로 옮겨 그려도 될 만큼 구도나 선의 기운이 짱짱하다. 가로는 짧고 세로는 긴 사이즈가 아파트 벽면 어디에 걸어도 작품의 기운이 살아난다. “소품이지만 소재의 규모는 충분히 들어갔기 때문에 현대인의 주거 공간 어디에나 부담 없이 걸 수 있어요.”

◇ 시류를 초월한 자유로움 추구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역점을 기울인 개념은 홍운탁월(烘云托月). 수묵화의 기법 중 하나인데, 달을 그리되 하늘이나 구름 등의 주변을 그려서 달이 드러나게 하는 표현법이다. 매화 가지나 댓잎에 쌓인 눈도 주변을 그려서 드러냈다. “대나무의 지조나 난초의 절개, 매화의 고결함이라는 관념은 털어내고 뼈대만으로 충분히 느낌을 살려내고자 했어요.”

작업 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그는 조명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밤 작업을 주로 하는 스타일인데, 이때 환한 조명 대신 달빛을 등불삼아 그린다. 오직 손끝에서 느껴지는 붓과 한지의 감촉만으로 사군자의 기운을 따라 그린다. 이런 작업방식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 관련된다. 그는 스스로를 작업실에 유배시키며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그림으로 펼쳐왔다. 이제는 손끝의 감각으로 무욕(無慾)의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 됐다. 전시 제목 ‘바람의 흔들림 속에도’처럼 50년 부력의 그는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그려요. 그런 주체적인 태도가 늘 새로운 화풍을 만들고 현재성을 담아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노자 도덕경 45장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이 있다. 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잔 기교가 없어 자연스럽고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 치졸하지만 오히려 그런 경지야말로 기교가 성숙하여 극에 달할 때 나오는 본래의 순수 상태라는 의미다. 비슷한 말로는 각기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이 보인다는 대직약굴(大直若屈)과 달변인 것은 마치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는 대변약눌(大辯若訥)이 있다.

석경의 이번 신작에서 대교약졸의 경지를 보았다면 작품 보는 수준이 천리안 정도는 된다고 자부해도 된다. 욕심을 비워내고 무심하게 툭 툭 던져진 작가의 선들에서 기교 이전의 순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화선지에 먹으로 표현한 졸박한 선들의 맛은 순수를 향한 역설의 절정이다. 그것은 곧 그의 의식이 가시적인 세계에서 본질의 세계로 격상한 것을 의미한다.

그가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본질의 세계”라며 “본질을 가지고 표현했을 때 가장 힘이 있고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결국 우리가 가야 하는 세상은 본질의 세계이고, 욕망을 비워낸 끝에 본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저의 수묵화는 그 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전시는 28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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