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옷 갈아입는 자연, 어찌나 아름다운지…주노아트갤러리, 김일환 개인전
형형색색 옷 갈아입는 자연, 어찌나 아름다운지…주노아트갤러리, 김일환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2.01.25 2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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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템신앙과 나무
과거 한풀이 매개였던 당산목
화폭 가득 채울만큼 크게 담아
민족의 고유 특성 도상화 시도
산 속 생활이 이끈 유희
빽빽한 나무·화사한 꽃…
샤머니즘 벗고 서정성 강조
“부드러운 숲 전하고 싶었다”
김일환 작
김일환 작.

그림은 내면을 조형언어로 감각화한 것이다. 장황한 논리나 합리적인 추론으로 문자화 하는 대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면 상태를 찰나적 형상으로 포착한다. 목우 김일환 작가에게 “그림은 정신적인 각성의 시적 표현”이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그에게 그림은 “어떤 모양새로 어떻게 표현되어지느냐”라는 ‘외피의 영역’이라기보다, 대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미학적인 감수성으로 내면화한 ‘의미의 영역’이라고 인식한다.

그가 “사물을 볼 때 창을 통해 보면 아늑하고 감미로운 정취가 묻어나는 것은 프레임을 한 번 거쳤기 때문”이라며 “그림은 사고 체계라는 프레임을 투과한 결과로서의 조형언어”라고 언급했다.

자연유희(自然遊戱)를 즐기는 화가 김일환 개인전 ‘나무 그리고 꽃’전이 주노아트갤러리에서 2월 15일까지 열린다. 지난 20연간 대구의 강원도로 불리는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의 깊은 산중에서 유유자적하며 깨달은 작가의 자연과 삶에 대한 관점을 확인하는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10년 주기로 새로운 화풍을 제안했던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내놓은 작품은 서정성으로 표현된 꽃과 나무다. “산에 들어가서 영혼을 맑게 하면서 그림도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

작가의 호는 목우(木愚). 직역하면 어리석은 나무다. 괄괄했던 성정을 순화하여 어리 석은 나무처럼 살고자 했던 뜻을 반영하여 40년 전에 지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0년대 초에 깊은 산중에 작업실을 짓고 소박하고 순한 나무로 살아가고 있으니, 호가 이끄는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작업의 결은 산속 생활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2000년대 이전에는 사물의 재현이나 인상파, 초현실주의 등 시대의 조류를 따르면서 자신만의 차별화를 모색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 작업에 관념성을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조형성이나 표현법 등의 외피보다 작품 속 의미에 무게중심을 옮긴 것. 내면의 감각화였다.

관념이 작업에 들어온 시발점은 1980년 중반이었다. 계기는 동남아 여행. 동남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민족의 고유한 풍물과 민족적 특색을 목격하게 되면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성찰하게 됐다. 그때부터 한민족의 핏속에 내재되어 자신에게로 이어져온 민족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비물질적이고 초자연적이며 거부 할 수도 없었던 한민족의 고유한 특질, 그에게는 그것이 한(恨)이었다.

작가는 전통문화 속에서 한(恨)의 정서가 응집되어 있는 유산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 아리랑이었다. 그가 “아리랑은 한(恨)의 노래였다”고 했다. “우리민족의 한(恨)을 대변하는 문화 중에서 아리랑은 단연 으뜸이었죠.” 당시 작가는 장승이나 전통탈, 부적, 스님 등과 물고기나 새, 산, 구름, 집 등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방식으로 아리랑에 깃든 한(恨)의 요체를 도상화해 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이전까지가 민족혼의 씨앗을 틔운 시기였다면, 2000년대부터 꽃을 피우는 봄날이었다. 여러 도상들이 가진 다양한 의미들을 한 화면에서 펼쳐놓은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주제로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아리랑에 깃든 한(恨)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담아낼 소재를 찾은 것. 그것이 선조들이 신목(神木)으로 섬겼던 당산나무였다. 아리랑과 당산나무와의 접목이었다.

“당산나무는 한풀이의 매개였어요. 사람들은 삶의 고비마다 당산나무에 자신의 한을 토해내고 정화했어요.”

당산나무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으로 표현됐다. 광활하게 표현된 배경의 중앙에 거대한 당산나무를 그렸다. 당산나무와 나무 아래 점처럼 표현된 탑이나 사람 형상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당산나무의 거대함은 압도감으로 다가왔다. “당산나무에 깃든 기원들을 기운으로 표현하기 위해 속도감 있는 몸부림으로 표현했어요.”

한(恨)을 대하는 작가의 내적 상태는 희비가 교차했다. 그는 한(恨)의 정서에서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이입시켰다. 가없는 고통의 끝에서 희망의 빛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옛 조상들의 굳건한 믿음을 읽은 결과다.

그 옛날 당산나무가 희망의 전령사가 되었듯, 작가는 한 걸음 더 나가 당산나무에 자신의 소명의식을 입혔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어한 것. “제 스스로 우뚝서서 당산나무가 되어 세상에 좋은 기운을 세상에 널리 퍼트리고 싶어요.”

이번 전시에 걸린 나무 작품은 서정적인 숲의 전형으로 표현됐다. 하늘과 땅 사이 공간에 나무를 빼곡하게 그렸다. 신비롭고 거대한 당산나무와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작가는 숲속 나무들에서도 당산나무와 같은 ‘의지처’의 지위는 여전히 부여하고자 한다. 지친 마음을 부드럽게 품어주는 숲의 미덕을 적용한 것.

“더 큰 자연으로 소재가 옮아왔어요. 당산나무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라면 숲속 나무는 부드러운 기운에 해당되죠.”

다음 작품의 소재는 조상목이다. 현재 한창 작업 중이다. 조상목은 산에서 자생적으로 씨앗을 틔워 몇 백년을 살아남아 사람들로부터 신목의 지위를 부여받는 나무다. 샤머니즘이나 토템신앙의 전형에 해당된다. “토템신앙은 미신이라기보다 자연존중 사상이 더 깊었어요. 저는 기원적인 의미와 자연존중에 대한 의미를 모두 수렴하고자 했어요.”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20여년 정도 됐다. 산속 작업실 생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20여년 전 대구미협 회장을 맡은 것도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협회 일로 바빠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다. “바쁘다 보니 일단 배경부터 칠해놓고 보았는데, 그 안에서 연못 속 고니와 수초들이 보였어. 작품 ‘자연유희’였죠.” 그 이후로 나무와 꽃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이어졌다.

일이나 삶에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순리다.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일이 진행될 때 당위성을 획득한다고 믿고,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 당위성이 진정성을 낳고, 그것이 결국 감동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녹아든 결과만이 감동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전시에 걸린 꽃 그림도 우연의 산물이다. 하드보드지나 캔버스에 바로 물감을 짜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나온 작품이다. “짜놓은 물감을 사용하고 남은 자리에 물감들이 흔적을 남겼어요. 그 흔적에서 꽃을 발견하고 그리게 됐어요.”

산속에서 생활하며 그가 사시사철 접하는 것은 숲과 야생화다. 머리와 의식 속에 수많은 꽃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고, 작가는 내면에 저장된 꽃을 직관으로 포착해 그려낸다. 꽃은 종류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꽃이라는 형태만 갖춰놓는다. 하지만 꽃잎이나 꽃술을 구성하는 색채는 아름답고 선은 섬세하기 그지없다. 여성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보드랍고 달달하다.

“우울하면 어두운 색을 쓰던 젊은 날과 달리 지금은 감정 상태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색이 밝아졌어요.” 순한 꽃그림은 결이 강한 나무 그림을 그리는 틈틈이 휴식처럼 그린다. “인간은 양면성이 있는데, 꽃은 제 안에 있는 순한 내면이 자연을 통해 발현된 것으로 봅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성향의 소유자다. 화풍도 마음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표현방식도 다양하게 구사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붓과 나이프를 오가고, 표현방식도 동·서양을 오간다.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걸림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작품에 대한 철학 역시도 다르지 않아서, 자연과 함께 무욕과 관조가 깃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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