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엄마의 이름으로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엄마의 이름으로
  • 백정우
  • 승인 2022.02.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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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좋지아니한가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컷.

낡고 오래되어 생동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추레하고 음산한 거리. 가게는 모두 셔터가 내려진 채로였다. 길가 중국집과 세탁소와 미용실 사이, 유독 빛이 잘 들어오는 사진관 2층에 한 가족이 모여 살았다. 엄마와 네 명의 자식들. 일찌감치 누군가에게 버려져 상처받은 아이들이었다. 고리의 돈을 빌려주고 못 갚은 사람의 장기를 떼어 파는 게 이들 가족의 일이다. 패밀리 비즈니스이고, 철저히 분업화되어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목적에 복무하고 가치를 공유하는 유사가족이다.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지하철 라커에 버려진 아이가 일영이라는 이름을 받아 이들 가족에 합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국영화가 유사가족을 다룬 건 90년대부터다.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하늘까지’에는 소매치기 일당이 유사가족을 이룬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독고다이보다 가족을 갖는 게 안전해”서다. 그래서 구성원의 이름도 돌림자를 쓴다. 황새, 촉새, 앵무새, 참새, 날치, 물새. 범죄와 멜로드라마를 적절히 섞은 영화는 가족이 만들어지고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주목해야할 건 시대적 배경이다. 때는 민주화의 기운이 정점에 달하고 전통 가치관과 가부장이 흔들리던 1992년이었다. 유사가족 출현의 사회적 조건이 갖춰졌다는 얘기다. 영화 전반을 이끌며 서사를 추동하는 중심인물이 홍일점 날치라는 점, 드라마 전반을 여성캐릭터가 견인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범죄에 연루된 유사가족은 혈연보다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울타리 너머를 엿보고 동경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구성원 간 연애감정까지 끼어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결국 공동체를 지키려는 가부장과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려는 구성원의 대립이 불가피하다. ‘걸어서 하늘까지’의 가족이 무너지는 건 날치가 지갑을 훔친 부잣집 대학생을 사랑하면서부터다. 담장 너머 세상을 욕망하는 마음과 무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이 격돌할 때 드라마는 비극으로 향한다.

‘차이나타운’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일영(김고은)과 석현(박보검)의 술집 시퀀스다. 그러니까 빚쟁이 아버지를 대신해 볼모 잡힌 석현과 해결사 일영이 술집에 앉았을 때(이미 그들은 레스토랑과 영화관을 거쳤다.) 카메라는 두 사람 주위 청년들을 트레킹 숏으로 훑는다. CF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일영은 여태껏 몰랐던 삶과 또래 대학생들의 로맨스와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비참한 생활과 비교한다. 일영의 심리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고 비극의 출발점이다.

석현을 지키기 위해 일영이 이탈하자 공동체 전체가 요동친다. 오빠와 동생이 죽고, 악당도 죽고, 우호적 협력자까지, 모두 죽고 죽이는 살육의 퍼레이드. 마침내 엄마에게 칼을 꽂으면서 슬픈 가족사는 종지부 찍지만, 유사가족의 소멸은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킨다. 일영을 입양 등록하여 주민등록증을 만들어놓고 떠난 엄마의 희생 위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다. 세상의 모든 신산함을 겪어내고 살아남은 일영은 엄마로부터 받은 성을 앞세워 가족의 계보를 다시 쓸 것이다. 여전히 차이나타운에서, 엄마의 이름으로.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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