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바위처럼 그곳에 있던 할아버지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바위처럼 그곳에 있던 할아버지
  • 백정우
  • 승인 2022.03.3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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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좋지아니한가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이혼한 아빠와 어린 남매가 이사를 간다.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 어제까지 살던 반 지하와는 사뭇 다른 경관이다. 너른 마당에 온갖 나무와 채소와 과실이 자란다. 풍경이 평화롭고 고적하다. 할아버지는 말수도 적다. 천천히 움직이는 만큼 표현이 서툴다. 좀체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무료한 일상에 활력과 윤기가 생기는 건 남편과 별거 중인 고모가 들어와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다.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아이들 눈에 비친 세상과 어른들이 애써 놓아버린 것들에 대한 환기다.

할아버지 집은 마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1층은 어른들의 공간이고 2층은 아이들 천국이다. 그곳에선 누구나 행복하다.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 외에는 분쟁과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다. 남매는 먹고, 놀고, 자고, 다시 반복인 일상으로 여름밤을 쌓는다. 아빠와 고모도 담배 피거나 동네 슈퍼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하는 일이 고작이다. 노동하는 장면도 돈을 버는 모습도 없다. 당연히 돈을 지불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크게 고민하지도 힘겨워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딸이 운동화를 빼내어 몰래 팔려다가 경찰서에 가도 아빠는 야단조차 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이다. 제아무리 영화가 허구이고 판타지라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말도 안 된다는 의심이 피어오르는 순간, 이게 뭔가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서, 1층 안방과 마당에서 흘끔 미소 짓는 게 전부인 할아버지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꼭 필요한 때조차 말을 아끼던 할아버지 말이다. 자식과 손주들이 세상 시름 잊고 제 집처럼 뛰노는 동안 할아버지는 뭘 하고 있었을까. 듬직한 바위처럼 안방에서 또는 공들여 가꾼 마당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정리 중이었다. 비루한 아들과 별거 중인 딸과 금쪽같은 손주들이 편히 쉴 수 있게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킨 집을 기꺼이 내어주기 위한 준비였다.

그렇다면 감독은 노동 없이도, 좀 가난해도,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해도 괜찮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론을 설파하고 싶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심하고 무감각한 가족의 여름밤을 보장했고 고단한 삶을 버티게 만드는 힘의 존재를, 평지풍파 속에서 오래된 나무처럼 늘 그 자리를 지켜왔으나 우리가 잊고 지낸 할아버지가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어쩌면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에 대한 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로만 재단하기 힘든 관계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가 많다. 그래서 늘 한 걸음씩 늦는다.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깨닫기 마련. ‘분노의 포도’의 할머니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반드시 캘리포니아로 가라는 말을 남겼으며, ‘미나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스트롱한 손자를 지켜주겠다던 할머니의 다짐은 미나리 밭으로 이어졌고, ‘남매의 여름밤’의 할아버지는 딱 한 번 손녀에게 미소를 보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밥을 먹던 손녀가 할아버지의 부재를 깨닫고는 통곡의 밤을 보낸 아침은 더 없이 영롱하고 화창했으니까. 한 가족이 모여 지낸 짧은 여름날을 통해 소시민 가족의 고단한 일상과 할아버지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남매의 여름밤’은 가히 2020년대 한국영화의 발견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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