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세종시대의 재상들
[류동학의 세상읽기] 세종시대의 재상들
  • 승인 2022.05.0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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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조선시대 재상급인 상신(相臣: 삼의정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을 이름)의 역량과 능력은 왕조를 지탱한 중요한 포인트였다. 재상(宰相)은 고기를 저미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재(宰)와 나무 위에 올라가 널리 세상을 굽어보며 재목을 고른다는 뜻이다. 조선은 400여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세종시대(418년~1450년)는 세종 18년(1436년)에 의정부서사제가 다시 실시되어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세종의 사주는 정축년 을사월 임진일생이다, 임진일(壬辰日)은 과강살로 강력히 남을 제압하는 살이자 일지가 진토(辰土,용)의 편관(偏官)으로 권력의지와 용인술을 말하고 주도면밀한 십성이다, 보통 정치인의 사주에는 월지와 일지에 편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

세종의 전반기 집권기는 태종의 치적을 이어받아 안정속의 중앙집권을 강화한 시기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재상들은 공신이자 태종대의 관리들인 심온(沈溫,1375 ~1418년),유정현(柳廷顯, 1355년∼1426년),박은(朴訔,1370~1422),우의정 춘곡 정탁(鄭擢,1363년 ~ 1423년),영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이직(李稷,1362∼1431),좌의정 이원(李原,1368∼1430),우의정 류관(柳寬,1346∼1433)등의 재상들이 주도했다.

세종의 집권 중반기인 세종9년 1월 좌의정 황희(黃喜,1363∼1452) 우의정 맹사성이 임명되고나서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또한 좌의정 허조, 영의정 최윤덕 등의 재상들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어 간다, 황희는 조선에서 가장 영의정을 오래 역임한 사람으로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합쳐서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영의정에 가장 여러 번 임명된 인물은 숙종 때의 최석정으로 무려 9번이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황희는 고려시대 1376년 14세부터 음서로 녹사로 관료생활을 시작하여 1389년 대과에 급제하여 이후 도승지, 6조 판서와 영의정까지 행정의 달인으로 무려 73년간 관료생활을 한 최장수 관료였다, 그러나 이러한 황희정승도 자식과 사위 서달및 처가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요즘 같으면 청문회를 통과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사주는 이석영 선생의『사주첩경』에 계묘년 을묘년 계사일 정사시로 나와 있다, 그러나 신도비에는 1363년 음력 2월 10일로 나와서 계묘년 갑인월 신사일로 나와 있어 기존의 사주와 다름을 알 수 있다.

고불(古弗)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부인은 창원 최씨(昌原崔氏)로 고려 말의 무장(武將) 최영(崔瑩)의 손녀이다. 아산시 맹사성의 고택이 사적 제109호로 최영장군의 집을 물려받았다. 고택, 사당, 구괴정,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단을 망라하여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 부른다. 1435년(세종 17) 2월, 76세의 노재상(老宰相) 맹사성은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함으로써 49년간의 관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좌의정 허조(許稠,1369∼1439)는 세종 시기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10년 재임) 등을 거쳐 1438년 70세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세종 조에 조선의 예학, 법 제도, 인사, 행정의 틀이 완비될 수 있도록 한 공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그는 중용의 정치가 황희와 도가풍의 정치가 맹사성과 더불어 법가풍의 정치가로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그는'세종의 위징(당태종의 충신)'으로 평가될 만큼 반대와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허조는 하양 허씨 문경공파의 파조로 추숭되고 있으며,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의 금호리·부호리와 와촌면 용천리 일대에는 허조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하양의 사액서원인 금호서원은 허조를 제향하고 있다.

최윤덕(崔潤德,1376∼1445)은 경남 창원에서 대대로 무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종, 세종 치세에 크게 활약하여 세종 연간에는 김종서와 함께 4군 6진을 개척하였다. 그가 개척한 곳은 여연, 무창, 자성, 우예 4군으로 서북 4군이라 불린다. 그는 태종대의 우의정 조영무(趙英茂, 1338년 ~ 1414년)에 이어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무인으로서 1433년 우의정이 되었고 1435년에는 좌의정까지 올랐다. 최윤덕 이후 무장으로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예는 중종대 박원종(朴元宗), 인조대 영의정 신경진(申景禛), 효종대 좌의정 구인후(具仁垕), 현종대 우의정 이완(李浣)등에 불과하다. 무장 출신으로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 종묘에 배향 공신으로 선정된 경우는 조영무, 최윤덕, 박원종, 신경진 외에는 없었다.

신개(申槩,1374∼1446)는 세종 후반기인 1439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며.1444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세종의 배향 공신은 총 7명이다. 이 가운데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그리고 세종의 스승인 이수(李隨, 1374∼1430)를 제외하고, 신하 중에서는 황희, 허조, 최윤덕, 신개가 배향되었다. 이제 윤석열정부는 어떤 인물들로 국정을 운영할지 기대된다. 재상급인 국무총리와 부총리급보다 한동훈 범부장관내정자의 미래가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큰 이슈를 몰고 올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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