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안녕, 미미
[백정우의 좋지 아니한家] 안녕, 미미
  • 백정우
  • 승인 2022.05.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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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칼럼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스틸컷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내 청춘의 한 때와 동행한 스타였다. 인기배우였고, 한국 최초의 월드스타였으며, 국제영화제 수장을 지내는 동안 생애 가장 고독한 시간을 보낸 작지만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대중이 기억하는 그녀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한 영화에서였지만, 나는 박광수와 장선우와 이명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있게 한 그녀를 기억한다. 민족과 이념과 한국사회 전통가치 앞에서 고민하는 존재론적 개인을 화두삼은 ‘베를린 리포트’, ‘경마장 가는 길’, ‘지독한 사랑’이 그것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정점을 찍은 그녀는 사회성 짙은 영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변신했고 여전히 스타였으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3년 동안 숱한 좌절과 상처를 입었다. 영화제가 키운 스타가 영화제로 무너진 셈이다.

그날 밤,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연속으로 봤다. 34년 만에 그리고 11년 만에.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영문과 미미와 신방과 철수와 법학과 보물섬이 그리는 청춘만가이다. “내가 아는 영어 단어라곤 러브와 섹스 밖에 없다”는 파격적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1987년 당시 톡톡 튀는 감성으로 답답하고 암울한 시대를 돌파하려는 재담꾼 이규형의 능력이 발휘된 작품이었다. 어수룩한 신입생 철수를 쥐락펴락하며 극을 끌고 가는 미미는 판에 박힌 예쁜 여주인공에 머물지 않는다. 이전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인 경아나 영자나 이화처럼 가련하지도 계급추락을 겪지도 않는다. 미미는 독립 보행하는 캐릭터였다. 청재킷과 청치마를 입은 패션리더였고 전위였으며 여신이었다. 영화 제목에 미미가 먼저 나오는 까닭이다. 보물섬이 없어도, 철수가 입대했어도, 학교도 잘 다니고 장애시설 봉사와 보물섬 유작까지 챙기는 씩씩한 미미는 그녀의 성품, 그 자체였다.

그녀의 마지막 장편 ‘달빛 길어올리기’는 조선왕조실록을 한지로 복원하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연출작이면서 영화작가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 깊은 영화다. 미미와 철수는 시청 한지과 주무관 필용과 복본과정을 영상에 담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으로 다시 만난다. 나이가 들고 주름도 늘어 세월을 품은 얼굴로 변했어도 여전히 지원은 미미였고, 필용은 철수였다.

필용과 지원은 다큐 편집본을 보다가 키스를 나눈다. 그녀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베드 신도 키스 신도 거절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영화를 위해서라면 주저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누가 봐도 뜬금없고 불필요한 키스 신을, 감독의 요구를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24년 전 철수는 미미에게 두 번 입맞춤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입대한 철수와 면회 간 미미가 동산에서 키스를 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달빛 길어올리기’의 엔딩,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필용과의 의리를 지키려 산속 깊은 곳까지 찾아와 달빛 아래 한지 복원 과정을 증언하는 지원이었다. 지원의 책임과 소명, 곧 그녀가 걸어온 길이다.

미미가 떠났다. 강수연이 우리 곁을 떠났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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