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유문화와 달구벌] 낙동·금호 두 젖줄, 선인들에 작은 행복 챙겨줘
[신가유문화와 달구벌] 낙동·금호 두 젖줄, 선인들에 작은 행복 챙겨줘
  • 김종현
  • 승인 2022.05.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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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달구벌 온누리(新天地)가 이렇게 개벽했다
신가유초승달달구벌
초승달 모양의 달구벌. 그림 이대영

 

인류, 60~70만 년 전부터 불 사용
10만 년 전 날 음식 익혀 먹어
종교적 목적·처형 방법으로도

◇불과 씨앗을 이용한 인류

인류는 60~ 70만 년 전부터 초목을 이용해서 불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40만 년 전부터 인류는 불을 다루어, i) 추위로부터 보온을 했으며, 동시에 밤의 어두움을 밝혀 활동시간을 연장, ii) 맹수나 해충으로부터 생명을 보호, iii) 생식(生食)에서 익혀 먹음(火食)으로써 질병을 줄이고 더욱 건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iv) 생활필수품인 토기, 청동기까지도 불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었으며, 무기까지 생산했다. 보다 높은 열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태워 숯을 생산했다. 이를 사용해 보다 단단한 철제무기까지 생산했다. 음식에서는 10만 년 전부터 날 것을 익히는(구이, 찜, 끓임, 볶음, 튀김) 요리를 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적 목적, 심지어 고문과 처형의 방법으로도 사용했다. 불을 이용한 화전 경작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산업발전에도 기여했다. 불을 이용한 토기(earth-ware) 제작은 BC 2만9천 년에서 BC 2만5천 년 전인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했다. 최초 씨앗을 뿌린 건 BC 1만3천 년 전 이스라엘 하이파 나투프(Natuf, Haifa, Israel) 여인이 귀리와 보리를 거주지(흙집) 부근에 뿌렸다. BC 65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요르단 서안(西岸) 예리코(Jericho, BC 9000년 경 도시)에서 최초 농경목축이 시작되었고, BC 6000년 경 이집트에도 농경지대가 늘어났다. BC 5000년 경 오리엔트(Orient) 지방에서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인류 최초로 맥주를 양조한 흔적으로 1만3천 년 전 나투프에서 삼혈 맷돌과 땅속 발효조가 발견되었다.

오늘날도 타이완 아리산 기슭에 살아가는 원주민 쩌우족(鄒族)은 신년축제로 태초암흑에서 인간세상에 불을 전달했던 전통을 이어 송화제(送火祭)를 거행한다. “한밤중 산정산신으로부터 불을 받아 험준한 산속을 무사히 빠져나와 마을까지 꺼지지 않은 채 갖고 온다.”는 미션을 수행한다. 바람과 폭우를 대비해 여러 사람이 불붙은 대나무를 모아 큰불을 만들어(以協竹火, 克風雪雨) 풍우를 극복하고, 험한 산길을 내려온다. 어려움 속에서도 간신히 동네에 전달해서야 비로소 새해의 새로운 불을 밝힌다. 유사한 ‘불의 축제(fire festival)’는 일본 아이치현 불의 제전이 있는데 휴대용 꽃불에 화약을 넣어서 불꽃을 터뜨리던 에도시대 고유전통을 1996년에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했다. 이외에 일본에선 신년 불꽃축제(Nozawa Fire Festival)와 도소진 마츠리(Dosojin Matsuri) 등이 있다. 1981년 쿠바에서도 캐리비언축제 속에 불의 제전이 들어갔다.

 

달성 대견사 부근 ‘너덜겅’ 발견
한반도, 바닷물에서 솟은 증거
신석기시대부터 새 세상 만들어

◇달구벌 신석기온누리(新石器時代)의 개막

지금부터 3만 년에서 1만2천 년 전쯤 지구촌의 최종빙하기 흔적으로 만들어진 지질천년기념물인 비슬산 암괴류(stony slopes)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달성군 유가면 용리 산1번지 대견사(大見寺) 옆 1천m/SL 부근에서 시작해 서로 다른 경사면을 내려오던 암괴류(巖塊流, 너덜겅)가 대략 750m 지점에서 합쳐져 450m 지점까지 어림잡아 2천m 길이, 넓이 80m, 두께 5m 정도의 돌 강(stone river or stone run)이 생겼다. 돌덩이 크기는 직경 1~ 2m 정도인데, 평균적으로 큰 것(長徑)은 1.9m, 작은 돌(短徑)은 1.0m이며, 면적을 계산하니 98만9천792㎡ 정도다. 불가리아 비토샤(Vitosha Bulgaria)의 너덜겅은 가장 작은 규모가 10~15㎞ 정도이니, 비슬산 너덜겅(stone run)은 세계적인 비교로는 아주 작은 규모다.

그러나 인공위성으로 촬영된 사진을 판단할 때 고위평탄면에 암괴류가 나타나는 건 지질학적 융기단서다. 즉 비슬산뿐만 아니라 좁게는 달성군, 달구벌 그리고 아주 크게는 한반도가 대략 1천m 정도 바닷물에서 솟아올랐다는 증거다. 이를 미뤄보면 고담책(古談冊) ‘토생전(兎生傳)’에서 토끼선생이 바다 용왕에게 갔다가 산신령에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의 기원근거가 바로 달구벌의 비슬산을 두고 한 말이다. 우리말로는 너덜너덜한 돌들이 거랑(개울)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 ‘너덜겅’이다. 천왕봉(天王峰) 괴암석의 모습이 마치 선녀들이 타다가 놓고 간 비파(琵琶) 혹은 거문고(琴瑟)와 같다고 해서 조선시대 비슬산(琵瑟山)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명산에 있는 대견사(大見寺)에 대해 1917년 6월 23일자 조선총독부관보 제1466호에 “동화사 말사 대견사(大見寺) 폐사(弊寺)를 6월 20일자로 허한다”라고 게재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사찰폐지가 관보에 등재한 사연은? 동화사 주지 김남파(金南波)가 풍수지리 대가인양 “동화사 말사 대견사가 바라보는 방향이 일본 대마도이기에 일본대마도의 기세를 짓누른다”라고 했던 말이 화근(禍根)이 되어 흔적도 없이 뜯어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달구벌의 명산을 인체에 비유하면, 팔공산과 비슬산은 신라에서 최고미녀 ‘수리 아가씨(首理阿詩, Beauty Goddess Hera)’의 양 젖가슴이었다. 여기서 신라어 ‘수리(首理)’ 혹은 ‘수로(首路)’는 오늘날 ‘으뜸’ 혹은 ‘첫 손가락’을 의미한다. 또한 낙동·금호 두 강물 젖줄(국물)이 흐르는 달구벌은 신석기시대부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갔다. 두 강물이 만나는 두 물 거리(兩水里, Mesopotamia)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져 ‘지상의 은하수’를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달구벌 새누리(新天地)였다. 또한 두물거리마다 부채모양의 땅(扇狀地, alluvial fan)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비옥한 초승달들(fertile crescents)’은 달구벌에 살아가는 선인들에게 풍족한 삶과 미래의 꿈을 심어주었다. 왜냐하면, 동맥과 정맥의 피 돌림이 원활함으로서 얼굴혈색도 좋아지고, 신체활동을 원만하게 하듯이 작은 하천들이 또다시 보다 작은 초승달들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곳에 살았던 선인들에게 아낌없이 작은 행복을 챙겨주었다.
 

동청룡칠수 키 별자리에 속해
해·달이 있는 곳 팔방 바람 주관
월성동 유적지에 좀돌연장 터
각종 출토물 1만3천184점 나와
달구벌 역사 2만 년 전으로 돌려

◇달구벌의 풍요를 안겨다 준 초승달

좀 더 깊이 천문향 달구벌을 소개하면, 달구벌(한반도)은 동청룡 칠수(東靑龍七宿)에서 키 별자리(箕宿)에 속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궁수자리의 동남쪽에 뜨는 별자리다. 농업의 풍요와 평온을 약속하며, 해와 달이 있는 곳에서 팔방의 바람을 주관하는 별이다. 이 별이 바로 지상세계에 변화무쌍하게 가뭄과 풍년을 가져다준다. 당나라 천문학자 대혜선사 일행(一行, 673~727)은 ‘태현경’에서 ‘풍요의 나라’,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기자가 살았던 남쪽나라’,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조선(한반도)은 절구 공이 별자리(木杵) 인근에 있는 키 별자리(箕宿)에 해당한다(朝鮮之星,木杵箕宿).”고 적고 있다.

조선실록에선 사성기수(四星箕宿)에 대해 43회나 천재지변을 예측하고자 기수변화(箕宿變化)를 관측했던 기록이 있다. “하늘의 마음은 백성의 마음이고, 백성의 마음은 하늘을 감동시킨다(天心應人心, 人心動天心).”고 선인들은 믿었다.

달구벌의 풍요를 안겨다 준 초승달 혹은 보름달 모양의 선상지(扇狀地)에서 살았던 흔적으로, 2천 년 월성동 유적지에선 좀돌연장(細石器)을 만들었던 터가 발굴되었다. 흑요석을 재료로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었던 솜씨를 전파하여 신석기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농경사회를 만들어갔다. 좀 돌날뿐만 아니라 긁개 등 각종 출토물 1만3천184 점이 나와 질·양 면에서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달구벌의 역사를 5천 년이나 소급해 단박에 2만 년 전으로 올려놓았다. 이런 돌연장을 만들었던 솜씨는 확산되어 달구벌 전역으로 돌연장을 만드는 터가 늘어났다.

진천천 유역(별샘 초승달), 상인동, 대천동, 달천리, 대림동, 사복동, 동화천, 팔거천 유역 등에서도 갈돌연장(硏石器)을 만들어 사용했다. 동화천 유역 무태벌판(한저들, 방울들, 동변앞들)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즐문토기, 갈돌연장을 만들 때 사용했던 몸돌(身石, body stone), 깨진 돌조각(薄片石, flake stone), 숫돌(磨石, grinder) 등이 고스란히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모든 공정을 집작할 수 있는 ‘밑돌 깐 흔적(集石遺構, stone-paved remains)’까지도 발굴되었다.

글=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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