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준의 세상이야기] 세계제국으로의 기행Ⅱ :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네덜란드까지
[김호준의 세상이야기] 세계제국으로의 기행Ⅱ :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네덜란드까지
  • 승인 2022.06.0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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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조지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5세기와 16세기에 대발견 시대, 대탐험 시대를 열었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화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의 디아즈는 1487년 희망봉을 발견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은 콜럼버스는 인도와 중국에 매료되었고, 도미니카에 도착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인 줄 알았고 그곳의 원주민은 인디언이라 불렸다. 콜럼버스의 처가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조그마한 설탕 사업을 했고 사탕수수 씨앗을 중미에 가져가서 유럽을 단맛에 빠지게 했다. 당시 천연두 등으로 북미, 중미, 남미의 인구가 1,000만 명으로 줄어들자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인간사냥이 시작되었고 1,500만 명을 중남미로 데려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당시 흑인 노예의 값은 총 3자루의 값에 불과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와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일본에 총을 전해주어 이는 훗날 일본을 통일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었고, 스페인은 그로부터 300년 동안 매년 220톤, 현재 가치 기준 6천억 원에 이르는 은을 전 세계에 공급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필리핀 마닐라는 16세기에 은, 도자기, 실크가 교환되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은을 통해서 세계 최초로 세계 경제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총과 대포 때문이다. 1533년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은 최신식 총으로 무장한 180명도 안 되는 군대로 5만여 명의 잉카 황제 직속의 군대와 싸워 1명도 죽지 않고 잉카를 정복했다. 지금의 멕시코 부근 아즈텍 왕국도 500명이 안 되는 스페인의 코르테스 장군에게 복속되었다. 다우 전투에서 포르투갈 함대가 아랍 함대를 격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랍은 화살로, 포르투갈 함대는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향신료에 대한 수요와 동경 때문이다. 향신료는 육식 위주 생활을 하는 유럽인들에게 절인 고기의 썩은 냄새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나중에는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육로가 끊기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를 얻기 위해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셋째,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가능케 한 3가지 사상, 즉 서쪽으로 향하면 동쪽으로 닿을 수 있다,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넷째, 나침반과 항해도구, 원양항해가 가능한 범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영토 확장이 부를 축적함과 동시에 분쟁이나 불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는 노예무역, 설탕 무역, 은 무역, 그리고 잉카제국의 식량인 옥수수, 감자, 블루베리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은 바다를 지배하려고 했고 중국은 바다를 포기했다. 유럽은 바다로 나오고 중국은 바다를 떠났다.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세계제국의 명운을 갈라놓았다.

17세기에 들어서서 경상도 크기의 인구 200만 명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가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스페인이 알함브라 칙령을 내려 유대인은 모두 스페인에서 떠나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관용과 자유의 땅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네덜란드는 부유한 개신교 금융업자, 최고의 기술자, 고급인력, 자본이 들어오면서 인종의 용광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 1602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만들어져 81명의 선주가 자금투자를 했으며 이후 세계 최초의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만들어졌다. 전 유럽의 자본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렸고 세계금융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이자는 3%, 다른 나라는 40%였다.

또한 네덜란드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었고 종교의 관용,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화가 램브란트, 철학자 데카르트,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가 활약했다. 네덜란드는 유럽 농업의 메카로 목축업과 원예 작물로 큰돈을 벌었다. 네덜란드는 바다의 마부로서 바다를 지배했다. 네덜란드의 화물선인 플루이트선(Fluyt)는 빠르고 그 화물 운송비는 경쟁국의 1/3에 불과하여 세계 바다 무역의 75%를 장악했다. 당시 세계 무역선이 21,000척이었는데 네덜란드가 15,000척을 가지고 향신료, 설탕, 실크, 모피무역을 지배했다.

다음은 세계 최초의 거품경제(Bubble Economy) 사례인 네덜란드의 튤립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네덜란드인들은 다른 꽃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의 아름다움 때문에 튤립을 사랑했다. 동인도회사가 터키로부터 수입해 오는 튤립은 몇 배의 이익을 가져다주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증권거래소에 선물로 상장되어 구근 하나의 거래가가 10년 치 숙련된 기술자의 소득인 1억 6천만 원, 집 한 채의 값까지 치솟았다. 그러다 1637년 버블이 터지고 수많은 광기의 투자가들은 거지가 되었고 이러한 버블 경제파동은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제국의 자리를 내어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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