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세조의 위징’ 보한재 신숙주의 사주와 업적
[류동학의 세상읽기] ‘세조의 위징’ 보한재 신숙주의 사주와 업적
  • 승인 2022.07.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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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세조 스스로가 '나의 위징'이라고 평가된 인물이 보한재 신숙주이다.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무려 300번이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던 인물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거울'이라 불리었던 간관이었다. 신숙주(1417∼1475)는 음력 1417년 6월 13일에 왕인박사와 도선국사를 배출한 영암군 구림마을, 세계문화유산인 무성서원이 있는 정읍시 무성마을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유명한 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서 아버지 대제학 신장(申檣)과 어머니 나주 정씨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성용-신덕린-신포시-신장으로 이어진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신숙주의 처는 집현전 학사를 역임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윤회(尹淮)의 손녀이다. 신숙주는 22세인 1439년(세종 21) 국왕 친시 문과에서 3등으로 합격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462년(세조 8년) 임오년의 정관운(正官運)에 46세의 나이로 수상인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신숙주는 세조로부터 '당태종에게는 위징이란 충신이 있다면 나에게는 신숙주가 있다'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그는 정난(2등), 좌익, 익대, 좌리(이상 1등)공신에 책봉되는 유례 없는 훈력(勳歷)을 누렸다. 이런 훈력은 한명회와 더불어,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수준이다.

시호 또한 문충(文忠)으로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숙주를 절의를 버린 기회주의자로 기억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 등이 충신으로 현창된 이후의 일이다. 또한 각종 소설 및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그러한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 6월 21일 무술 1번째 기사(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의 영의정 신숙주의 졸기에 보면 그의 사주는 다음과 같다.
 

 

신숙주는 소서와 대서가 지난 절기에 입추를 며칠 앞두고 논밭같은 기토(己土)의 식신이 그 달을 지배하는 절기에 태어나 기토(己土)의 식신이 왕하다. 한편 조상부모형제궁인 년월에 ⑤정화(丁火)비견과 ⑥정화(丁火)비견이 강하다, 명리학 십성(十星)용어인 비견(比肩)은 인물로는 형제 친구 동료를 나타낸다.

신숙주는 비견에 해당하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舟)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申孟舟)·신중주(申仲舟)·신숙주(申叔舟)·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였다. 이들 형제는 모두 과거급제했다. 한편 비견은 성삼문, 박팽년, 정창손, 한명회,권람등의 친구 동료에 해당한다,

이 사주에서 생년의 ④유금(酉金)편재는 아버지와 삼촌에 해당한다, 즉 신장, 신평, 신제등이다. 특히 신숙주의 숙부 신평은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요절했으나 그의 셋째 딸이 출가하여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낳았다. 그러므로 신숙주는 폐비윤씨의 외당숙(5촌)이 된다,

신숙주의 부친은 신숙주가 16세 되던 해에 별세했다. 이런 현상은 명리상 편재를 극하는 미토월(未土月)의 지장간 정을기(丁乙己) 가운데 정화(丁火)가 연월일에 모두 투출하여 년지의 ④유금(酉金)편재를 녹이는 영향이다.

그는 이상보다는 현실적인 경제와 경영마인드가 강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의 생년과 생일의 미토와 유금의 식신편재격의 영향이 크다, 이런 그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마인드가 성삼문과의 운명을 달리한 명리학적인 근거가 된다.

신숙주는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외국어에 능통하고 집현적 학자로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보한재집』,『북정록』,『사성통고』,『농산축목서』,『해동제국기』등이 있다.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등이 현전한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예술적인 업적과 연구력은 근본적으로 미토의 식신적인 성향과 유금의 문창귀인(文昌貴人)과 문곡귀인(文曲貴人)의 영향이다,

신숙주는 도학정치가 본격화되는 조선중기이후 그의 정치, 군사, 외교, 학문, 예술적인 업적보다 변절자라는 오명으로 잘못 와전되어 인구에 각인되기 시작했지만 다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는 무송윤씨와의 사이에 8남1녀를 두고 측실 배씨와의 사이에 1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신주의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고 이시애 난때 죽은 차남 신면의 아들이 대제학과 좌의정을 역임한 신용개이다, 서녀는 세조의 후궁 숙원 신씨이다. 그의 아들 신정은 태종의 서자 후령군의 사위로 꾸법을 위반해 처형당했다. 신숙주의 직계 후손중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신채호, 신규식,신건식 선생이 있다,

신숙주는 그의 행적을 볼 때 위징보다는 당 태종의 명재상 방현령에 가까운 성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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