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유문화와 달구벌] 한반도는 ‘하늘 별나라’…달구벌은 ‘동쪽 별나라’
[신가유문화와 달구벌] 한반도는 ‘하늘 별나라’…달구벌은 ‘동쪽 별나라’
  • 김종현
  • 승인 2022.07.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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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달구벌의 옛 나라이름 찾아서
삼한시대 일본서기 속 ‘탁순국’
차음표기가 ‘달구벌’과 유사
벌 앞에 있는 나라 ‘앞독국’ 표기
신라어로 ‘다벌국’이라 불렸을 것
서지학상 대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왜병 군사지도에 나와
영조 이전 ‘大丘’ 정조 이후 ‘大邱’
경덕왕 시절 행정구역 개편하며
달구벌현 → 대구현 변경 기록
신가유샛별
중국에서 한반도는 ‘하늘 별나라(天辰之國, Star Heaven)’ 즉 별나라(辰國)라고 칭했다. 그림 이대영

◇생명나무(生命樹)에 별이 열리는 달구벌로

한반도를 고구마 텃밭에 비유해 통시적으로 살펴보면, 산맥 아래에 나라가 생기는 모습이, 줄기마다 땅속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리는 꼴이다. 삼한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주렁주렁 열렸다.

진수의 삼국지와 한서에서 마한(馬韓) 54개 국, 변한(弁韓) 12개 국과 진한(辰韓) 12개 국으로 78개 국이 열국 각축전을 벌였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는 ‘하늘 별나라(天辰之國, Star Heaven)’ 혹은 줄여서 별나라(辰國)라고 칭하였다. 북두칠성의 천국삼원(天國三垣)을 본떠 진국삼한(辰國三韓, Tree Lands in Heaven Kingdo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 한반도 ‘별나라 땅(辰國)’로 들어온 이유는 그들의 천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上通天文). BC 560년 이전 시가집 ‘시경(詩經 小雅大東篇)’에는 주나라의 세상을 한탄하는 시가 있는데 “남쪽하늘 키별나라(箕星國)엔 키질 한 번 하지 않아도 (배불리 먹겠구먼), 북쪽하늘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어 그것으로는 술도 국물로 뜨지 못하겠구먼. 남쪽별나라에 키 모양의 별(箕星)이 있어 혀를 내밀어 (맛있는 음식을) 삼키는 듯하고나. 북쪽 국자모양의 북두칠성이 있어. 서쪽으로 국자자루가 걸려 있다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금성(金星, 샛별)이 6개월은 새벽별(鷄鳴聲)으로, 6개월 뒤엔 저녁 장경성(長庚星)으로 뜬다는 사실까지도 시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 천문학 용어로는 남동쪽 궁수(射手) 별자리를 보고 한반도로 찾아들어왔다. 중국에선 키 별자리의 조선(箕子朝鮮)이라고 조선반도를 좋게 불렀다. 조선시대 천문학자들도 조선은 키 별자리에 속한다고(朝鮮屬星卽箕宿也) 믿어왔다. 한마디로 동양천문관에서 농사농자(農)는 “인간의 간곡(懇曲)한 기원을 별(星辰)이 점지해주 것(懇曲祈願, 得星辰産)”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샛별(曉星)보고 일터에 나와서 저녁별(夕星)을 보고서야 비로소 집으로 들어갈 만큼 간곡하게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晨星夫出, 夕星夫入).

동진(東晋)의 간보(干寶, AD 286 ~ AD 336)라는 천문도사는 ‘신선들의 괴기한 기록(搜神記)’을 남겼는데 “남두육성은 생명의 나무에 물을 주고 계셨고, 북두칠성은 죽음의 강에다가 물을 쏟아 붓고 있더라(南斗注生, 北斗注死).”라고 적고 있었다. 4세기 이후에는 한반도 선인들은 남두육성을 농업의 신으로 모셨다. 한반도 고인돌 덮개에는 북두칠성을, 선돌 앞면에 남두육성을 암각화로 새겨왔다. 동구 괴전동의 별자리 암각화, 달서구 진천동 고인돌의 동심원과 달성군 천내리 고인돌의 동심원 암각화도 별자리를 그려놓고 있다. 특히 달구벌은 ‘동쪽 별나라(辰國)’였으며, 그 가운데 ‘별 가운데 별(辰韓)’나라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 ‘천왕지(天王池)’가 있다.

909년 득난(알찬)에 올랐던 최치원이 달구벌 남령에서 들판을 내려다보고 “옳거니, 이곳이 바로 신성한 땅이지(是處是聖地也).”라고 경탄했던 곳이 달구벌이었고, 특히 천왕지(天王池)였다. 천왕지는 매립되었으나 오늘날까지도 “별빛 쏟아지는 샘(辰泉)”이란 진천동(辰泉洞)이 있다. 진천동 선사시대 고인돌에서는 동심원 3개로 하늘 닭(天鷄 : 二眼一足, 飛上天鷄)을 의미하는 추상화를 암각화로 남겼다.

◇삼한시대 달구벌에 있었던 나라이름은?

삼한시대 달구벌이 속했던 국명에 대해 아직도 확정된 게 없다. 삼한시대 대구가 탁국(卓國) 혹은 탁순국(卓淳國)이었다고 주장해왔던 근거는 일본서기다. 249(신공황후49)년에 “아라다와케(荒田別)와 가가와케(鹿我別)를 정벌사령관으로 삼고 구씨(久氏)와 함께 신라정벌을 도모하고자 출병해 탁순국까지 들어가서 신라를 기습하였다(至卓淳國, 將襲新羅).”라는 기록을 근거로 탁순국(卓淳國) 차음표기가 다벌국(多伐國) 혹은 달구벌(達句伐)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달구벌=탁순국을 정설로 비정(比定)하였다. 그러나 2020년 9월 창원시 진해구 제2 안민터널 공사장 발굴유적에서 한자기록 목간(木簡)이 대량적으로 발견되었고, 이로 인해 탁순국이 창원에 있었다는 사실(史實)이 밝혀졌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 즉위 29(108)년 5월에 “큰 물(홍수)이 났다. 그로 인해 기근이 심각해졌고, 10도 각처에 관리를 보내어 국고를 열어 먹을 걸 나눠줬다. 그럼에도 민심이 들끓었던 비지국(比只國, 오늘날 경남 창녕 혹은 경주 안강), 다벌국(多伐國, 達丘伐 혹은 포항 흥해) 그리고 초팔국(草八國, 합천군 초계면)을 토벌해 병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 대구(달구벌)가 속했던 나라를 다벌국(多伐國)이라고 i) 이병도 사학자가 주장했다. 그 근거는 정벌을 하려고 출정했던 군대의 진군방향으로 봐서 오늘날 창녕 ▶ 달구벌 ▶ 초계(합천) 일진삼병(一進三幷)전략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에 착안했다. 물론 안강 ▶ 달구벌 ▶ 초계(합천)으로 성동격서전략을 구사할 수 있으나 천재지변과 민란으로 국가위기를 자초할 전략은 구사하지 않는다는 상식이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언어학적으로 ii) 오늘날 경산에 소국 압독국(102년에 신라에 병합)이 있었는데 “벌 앞에 있는 나라(達伐前國)”를 신라어로 “앞독국(押督國)”으로 표기했다고 보면 ‘다벌국(多伐國)’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즉 ‘달구벌(達丘伐) 앞’을 ‘앞량(押梁)’으로도 표기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압량읍(면)이라고 한자를 독음할 수 있으나 삼한의 압독국(押督國)이라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정사서(正史書)에서 달구벌의 나라이름 찾기

먼저 서지학상 현재 지명 대구(大邱)를 거슬려 올라가면 대구(大邱)란 지명이 임진왜란 왜병의 군사지도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역사적 기록은 영조 이전은 대구(大丘)이고, 정조 이후에 대구(大邱)였다.

역사기록으로는 영조26(1750)년 지역유생 인천이씨 이양채(李亮采, 1714~1776)가 “신(臣)들이 사는 고을은 바로 영남대구부(嶺南大丘府)입니다. 이른바 대구(大丘)의 구(丘) 자는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인데, 신전에서 축을 읽으면서 곧바로 이름자를 범해 인심이 불안하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편리함을 따라 변통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이 미안하고 공경이 부족한 탄식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했으나, 전국에 그와 같은 사실이 많거니, 어찌 선현들이 그럴 몰랐단 말인가라고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정조2(1778)년 5월 전국적인 기근(보리 고개)으로 인한 민심을 달래려고 1월부터 시작했던 진휼미 방출을 5월 5일까지 했던 결과를 보고하는데 ‘영남 기근백성 1만3천283명에게 9천527석을 풀었다. 그 가운데 대구에 구급했다(嶺南公賑知禮...安東, 大邱等邑,)’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구(大丘)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경덕왕16(757)년 12월에 9주 5소경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유어로 된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칭하면서 달구벌현(達句火縣)을 대구현(大丘縣)으로 변경했다. 수성군(壽城郡)에 속했던 달구벌현(達句火縣)을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했다.

이전에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삼국미상지역(三國未詳地域)으로 제시된 대구(大丘) 수구성(水口城)이 있었는데, 신라 땅 대구가 아니고, 고구려 영토였다. ‘달구화현(達句火縣)’은 달구벌이라는 고유지명 음차표기(音借表記)이다. 오늘날 달성 현풍의 서쪽 산성에다가 진흥왕5(544)년에 지역방어병력으로 십정(十停, 三千幢) 가운데 제4번째 ‘흑금효정(黑衿驍停)’을 설립해, 1만8천여명 병정으로 흑색깃발(黑驍 : 검정말) 군단(黑衿幢)을 주둔시켜 ‘삼량법정(參良火停)’이라고 했다. 현풍을 고유어로 ‘삼량벌(參良火)’이라고 했다. 10정(十停) 가운데 제2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이란 불교가 도입되면서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요새지(要塞地)에 해당하는‘부리(夫里, puri)’로 표기한 것이다.

글 =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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