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성종의 천기와 사주
[류동학의 세상읽기]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성종의 천기와 사주
  • 승인 2022.07.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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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확립한 것을 성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는 시호이자 묘호가 성종(成宗)이다. 성종은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와 문물,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군주라는 뜻이 담겼다. 동아시아에서 성종(成宗)은 고려 성종(981~997) 왕치, 중국 5대 10국 시대 오월(吳越) 3대 군주 충헌왕 성종(941~947) 전홍좌와 남당(南唐) 성종 이초, 원의 2대 황제 원성종(元成宗,1294~1307), 청 성종 도르곤(다이곤)과 조선 성종 등 6명이 있었다. 성종(聖宗)은 요의 성종(982~1031)과 원 세조가 추존된 원성종이 유명하다,

성종은 휘는 혈(娎)이며 세조의 적차손으로 조선의 제9대 국왕이 되었고 제10대 연산군과 제11대 중종의 아버지이자 제12대 인종과 제13대 명종의 할아버지이다.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적차남으로 태어났으나 그 해 아버지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왕위 계승권은 예종에게 넘어갔으나 예종마저도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왕위 계승 서열 3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촌동생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장인 한명회의 지원과 할머니 정희왕후의 지목을 받아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년(성종 5년)에는『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대전속록』과『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東文選),『악학궤범』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서자차별법, 관수관급제 등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尹弼商), 1491년(성종 22년)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북방 방비에 힘썼다. 조선 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성대는 성종의 치세 후기에 퇴폐 풍조를 조장하기도 했다. 또 여색을 밝혀 여러 후궁을 두었는데 후궁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을 조정하지 못하여 후일 연산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①신금(申金) 겁재와 ③묘목(卯木)편재의 문제이다.

『성종실록』1권, 총서편에 "천순(天順) 원년 정축년(1457년, 세조3년) 7월 30일 신묘(辛卯)에 왕은 동저(東邸)에서 탄생하였다." 이때는 간지로는 정축년 무신월 신묘일에 해당한다,

 

성종은 여름의 과실이 무르익어 가는 늦은 여름이자 가을을 알리는 절기인 입추(立秋)가 21일이 지난 ①신금(申金) 겁재의 월령인 무임경(戊壬庚) 가운데 경금(庚金)의 겁재(劫財)가 사령(司令)하는 시절에 태어났다. 신금(申金)월은 범, 원숭이, 뱀, 돼지인 인신사해(寅申巳亥)의 사맹(四孟)의 하나로서 월의 지장간이 절기를 지나고 나서 7일은 여기(餘氣)로서 전달의 기상인 무토(戊土)가 사령하고, 8일부터 14일까지의 7일간은 중기(中氣)로서 다음 계절인 겨울의 중심달인 해수의 천간인 임수가 사령하고, 마지막으로 정기는 경금(庚金)이 사령한다. 즉 인신사해는 하늘의 기상인 천간을 감춘 지장간이 7:7:16일의 비율로 월지를 지배한다.

①신금(申金)은 역마의 속성을 지녔다. 그러므로 차량, 철도, 운송, 전기, 통신, 선박, 무기, 여행, 유통, 운수, 무역, 외국, 검경, 금융, 증권등과 인연이 깊다, 또한 봉사하는 직종인 개인교습, 문방구, 보육, 유아교육등과 의사, 약사, 간호사, 복지사 등과 인연이 깊다.

성종은 외부에 잠행을 자주 나가서 백성들의 삶을 자주 살핀 군주로 유명하다, 한편 성종은 조선의 태조 태종, 세조 등이 지녔던 무인기질을 이어받았고 대담함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매우 컸다. 세조는 어린 성종을 태조 이성계에게 견주기도 했을 만큼 그는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그는 사냥과 활쏘기를 즐겼고 윤필상과 허종으로 하여금 2번에 걸친 북정을 단행할 만큼의 호전적인 면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타고난 천기에 십성(十星)이론인 편관과 겁재가 동반하면 전투력이 대단하고 정치, 군사, 감찰, 경찰, 수사관, 정보원, 의사, 약사, 간호사, 스포츠에 남다른 소질과 감각이 발달하였다고 본다. 성종의 천기는 ⑤정화(丁火)편관과 생월의 ①신금(申金) 겁재가 결하여 이런 재능을 소유한 인물로 보인다,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란 별명이 붙었다. 25년의 재위기간에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맞아들였고 16남12녀를 거느렸다. 자식이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

성종은 1494년 음력 12월 24일(1월 20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폐병, 기허증, 서증, 등창 등의 후유증으로 승하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그의 무덤은 임진왜란때 도굴되어 현재는 선릉은 가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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