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 배우
[달구벌 아침] 배우
  • 승인 2022.08.1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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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BDC 심리연구소 소장

자유 여행으로 떠난 그리스 여행, 아테네 투어를 현지에 사는 한국인 가이드에게 안내를 맡겼다. 근데 이 젊은 가이드, 여느 가이드와는 좀 다르다. 그냥 안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담아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표현해낸다. 표정도 풍부하고, 감정도 풍부하다. 그의 개인사를 들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이드의 일을 하기 전, 한국에서 연극배우를 했었다고 한다. 어쩐지 단순히 정보를 전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역사 속으로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다. 역시 연극배우를 해서 그런지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한때 배우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서울 대학로 연극 극단에 찾아가서 청소부터 시작해 제대로 연기를 배우고 싶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유명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만족하며 연극, 영화 무대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길을 가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을 때가 한 번씩 있다. 그런데 돌아보니 이미 나는 배우로서의 삶을 충분히 살아내고 있었다.
군대 입대하고 소대 발령받은 첫날의 풍경이다. '신병 노래 한 번 불러봐'라고 하면 부를 노래도 준비했고, '애인 있나? 누나 있나?' 등의 애꿎은 질문에도 빠져나갈 답을 다 준비하고 있었는데 현실에선 주먹이 날아왔다. 또 몇 시간 안에 10여 페이지에 빼곡히 적힌 것들을 모두 외우라고 했다. 주어진 시간은 서너 시간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어느덧 점검 시간은 다가왔고 신병을 관리하는 험상궂은 고참은 저녁 식사 후 세면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세면대 위에 걸터앉은 그는 내게 하나씩 외운 것을 확인했고, 연이어 나의 실수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렸다. 그러다가 내 귀와 그의 손바닥이 '하이 파이브'를 해버렸다. 느낌이 '세~'했다. '짝'이라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퍽'이라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순간 정전이 되는 듯한 느낌. 직감적으로 귀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아차렸다. 이때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어~!!'라는 외마디 비명. 이어진 고참의 "뭐? 어~?어~? 이것 봐라." 연이은 수십번의 무차별 따귀 사례. 고막은 나간 것 같고, 따귀는 계속 때리고 있고.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더 때려 보라는 생각에 내 얼굴을 그에게 더 들이밀었다. 내 뺨이 먼저 그의 손을 마중 나갔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그렇게 있는 힘껏 뺨과 목 주위를 풀 스윙으로 수십번 때리고서야 그는 스스로 지쳐 갔다. 내일 다시 보자며 더 이상의 따귀는 없었다. 그날 밤 난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한쪽 귀는 '윙~'하는 소리뿐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는 분노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런 나와는 반대로 나를 때린 그는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날 밤 난, 상상 속에서 수십, 아니 수백번 살인자가 되었었다. 새벽녘이 될 때쯤은 죽도록 패버리고 영창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에 사랑하는 우리 엄마 얼굴이 내 눈앞에 보였다. 뜨거운 눈물이 입속으로 흘러 짠맛이 가득했다. 잠시 후 나의 분노는 냉정함으로 바뀌었다. 뜨거웠던 가슴이 차가워졌다. 분이 가라앉고 어떠한 행동이 내게 득이고 실이 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겁먹은 척하자"라는 것이었다. 이후 난 겁먹은 연기를 했다. 고참이 부르면 겁먹은 척했다. 그러고 나니 고참은 웃으며 "저놈 저거 겁먹은 거 봐라. 하하"

이때부터 난 연기를 했다. 빠릿빠릿한 졸병 연기를 했고, 훈련할 땐 누구보다 용맹한 군인의 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노련한 고참의 연기를 했고, 휴식할 땐 맘 좋은 형 같은 연기도 했다. 전역 후 대학생의 연기를 했고, 취업하고서는 직장인 연기도 했다. 결혼 후, 든든하면서도 친구 같은 아버지로, 다정한 남편으로 그렇게 나는 삶의 배우가 되었고 내게 주어진 역할로서의 연기를 지금까지 제법 잘 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근데 정작 나 김순호의 삶은, 역할로서의 삶에 비해 제대로 한번 그럴싸하게 살아보지 못한 듯하다.

너무 오래 연극 무대에만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 나의 자리에 앉아야겠다. 넥타이 풀고, 하얀 와이셔츠를 벗어버리고 편한 나의 옷으로 갈아입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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