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파란만장의 밤을 위로하는 ‘달빛’
[백정우의 줌인아웃]파란만장의 밤을 위로하는 ‘달빛’
  • 백정우
  • 승인 2022.08.1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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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상선언' 스틸컷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이 빚은 바이러스 테러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운항중인 비행기와 지상의 대책본부가 배경이다. 비행기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끔찍한 상황을 경험한 승객들을 태운 스카이501편이 우여곡절 끝에 성무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페이드아웃. 창밖을 보며 안도하는 승객들의 표정이 새겨진 엔딩크레디트 위로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3번 ‘달빛’이 흐른다.

감독은 생과 사의 아비규환에서 피어나는 인간다움이야말로 비인간적 범죄에 대항하고 이겨내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팀장과 승객의 인간다운 결정 즉 이타심은 이 영화를 신파로 이끄는 동력이기도 했다. 상영 중인 영화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엔딩을 따뜻하게 장식한 ‘달빛’을 주목한다. 그리하여 떠올리는 영화 하나.

200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는 도쿄의 한 가족이 겪는 파란만장을 통해 장기불황과 세계금융위기 시대를 통찰한다. 실직하여 쇼핑몰 청소부가 된 가장은 퇴근길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내는 강도에게 납치되어 바닷가 오두막까지 가게 되고, 막내는 무임승차로 경찰서 신세를 진채, 온 가족이 집 아닌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저마다 지옥 같은 밤을 보낸 한 가족이 집에 다시 모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침밥을 먹을 때, 평온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명한다. 혹독한 시절을 무채색에 가까운 건조함으로 일관하던 영화가 준비하는 묵직한 한 방. 피아노콩쿠르에서 막내 겐지가 연주하는 드뷔시 ‘달빛’이다.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선율이 흐를 때 심사위원과 관객이 하나 둘 씩 모여 들며 엔딩.

드뷔시 ‘달빛’은 영화에 단골로 쓰인 클래식곡이다. ‘프랭키와 쟈니’의 두 사람이 첫 밤을 보낼 때 흘렀고, ‘그린파파야 향기’에선 쿠엔 도련님을 연모하는 무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으며 ‘트와일라잇’의 테마곡이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이탈리아 베르가모 지역을 여행한 드뷔시가 1890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었고, 가장 유명한 소품이 3번 ‘달빛’이다. 드뷔시는 1872년부터 십여 년 간 바그너를 숭배했다. 19세기 말은 시각혁명의 시기였고 장대한 음악이 대세인, 위대한 베르디의 시대였다. 그러나 스펙터클로 웅변하는 바그너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과 맞지 않자, 드뷔시는 바그너와 결별하면서 음악적 변신을 시도하는데,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내놓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달빛’은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분투 끝에 찾아온 평화와 안식 같은 곡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도쿄 소나타’도 ‘비상선언’도 그 야단법석의 밤을 겪은 후에야 엔딩에서 이 찬란한 피아노 선율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그 곡이 드뷔시의 ‘달빛’이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추신) ‘비상선언’의 엔딩크레디트에 흐르는 드뷔시 ‘달빛’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로 실렸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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