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그 집에 누가 사는데요?”
[백정우의 줌인 아웃] “그 집에 누가 사는데요?”
  • 백정우
  • 승인 2022.09.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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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여운 남자' 스틸컷
영화 '귀여운 남자' 스틸컷

 

이혼한 아내는 딸과 함께 동창 녀석과 살림을 차렸다. 사고뭉치 아버지는 경로당 친구를 폭행하거나 젊은 과부댁에게 추근대거나 사채를 쓰고 갚지 못해 도망다니는 신세. 사춘기 딸아이는 되바라져 곧 첫경험을 치를 태세다. 그래도 이 가족들과 함께 살겠다고 안간힘 쓰는 남자. 주인공 기성은 아내와 헤어진 원인이 작은 집에 있다고 믿는다. 코딱지 만한 집에서 시아버지와 더는 같이 못살겠다(시아버지가 여자라면 환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아내 말이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기성의 인생 목표는 방이 4개이고 화장실도 2개인 38평 아파트다. 38평 아파트로 이사만 가면 떠난 아내도 아슬아슬한 딸도 다시 돌아올 거라 믿는다.

김정욱 감독의 ‘귀여운 남자’는 집과 가족을 외피로 목표지상주의의 허점과 위험성을 짚는 영화다. 주인공은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예의와 염치와 공동체 정신이 몸에 밴 모범시민이다. 큰 평수 아파트를 향한 염원이 윤리적으로 문제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한발 한발 목표만 보고 전진하는 주인공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어쩌면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파트 마지막 잔금을 앞둔 날, 사채업자가 찾아와 대리상환을 요구하며 아버지를 납치 감금한다. 인물의 행동을 무심하게 전시하던 감독은 아버지의 빚을 갚아줄 것인지, 아니면 잔금을 넣을 것인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중간 목표를 위해 분투하던 인물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러니까 기성이 진퇴양난의 순간 일영을 길라잡이로 내세운다.

종종 인간은 목표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놓치곤 한다. 목표에 집착한 싸움에만 몰두하면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에서 한윤희는 독재정권 타도라는 목표만 보고 투쟁해온 이들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헌신과 희생과 사랑을 통해 알려준다. 저항에만 몰두하다 잃어버린 그 무엇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라는 얘기다.

‘귀여운 남자’의 클라이맥스. 아버지가 감금된 창고 앞에서 나누는 기성과 일영의 대화는 극단적 설정으로 헛웃음을 유발하던 영화가 꽁꽁 숨겨놓은 보석 같은 쇼트다. 진부하게 달려온 시간을 일거에 해소하는 회심의 일격이다. 왜 그렇게 큰 아파트에 집착하느냐는 일영의 물음에 기성은 방이 4개니까요, 라고 답하고 일영은 집이 넓어지면 부인과 딸이 돌아오느냐고 재차 묻는다. 집이 없으면 다 끝이라고 기성이 악을 쓰자 이를 되받아치는 일영의 말. “그 집에 누가 사는데요?” 모두가 떠난 자리에, 38평 아파트만 덩그러니 놓인 폐허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일영의 반문은 하나의 죽비다.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억지스런 해피엔딩이 못마땅할지라도 나는 일영의 한 마디로 이 영화의 허물을 덮어주기로 결심했다. 목표만 보고 달리다 보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놓치기 십상이다. 나도 당신도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 사실을 일깨워준 것, ‘귀여운 남자’의 미덕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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