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9명의 번역가', 벙커에 갇힌 번역가들…이들 중 유출범 있다
영화 '9명의 번역가', 벙커에 갇힌 번역가들…이들 중 유출범 있다
  • 김민주
  • 승인 2022.09.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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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동시출판 전 유출 방지
세계 번역가들 한 곳서 동시 작업
편집장에 도착한 유출 협박 메일
번역가들 감시하며 범인 물색
번역가-편집장 두뇌싸움 치열
고전 추리극 즐거움 고스란히
강렬한 반전, 극의 방점 찍어
뻔한 장르물 속 그 이상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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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9명의 번역가’ 스틸컷. 이놀미디어 제공

“만약 번역가에게 베스트셀러 소설을 도둑맞는다면?”

전 세계적으로 4,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다빈치 코드'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의 출판사 몬다도리는 2013년 5월 14일 전 세계 동시 출간을 계획한다. 출판사는 동시 출간일 전에 원작이 유출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묘안을 떠올린다.

전 세계 각국의 번역가를 보안이 완벽하게 유지된 공간에 가둬놓고 동시 번역을 시켜 유출을 방지하겠다는 것.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실제로 2013년 2월, 11명의 번역가들은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 지하 벙커에 갇혀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 ‘9명의 번역가’ 감독 레지스 로인사드는 이 실화를 모티브로 삼아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로 엮어 추리 영화를 만들어냈다.

베스트셀러 '디덜러스' 3권 ‘죽고 싶지 않았던 남자’를 번역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가장 판매고가 높은 9개국의 번역가는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저택으로 초대된다. '디덜러스'의 팬이자 종말을 믿는다는 러시아 부호가 소유했다는 이 저택에는 세상이 멸망해도 흔들림이 없을 듯한 벙커 시설이 있고, 9명의 번역가는 수십 명의 경호원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번역을 이어간다.

번역 작업에 돌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덜러스' 시리즈를 단독 출판 중인 옹스트롬 출판사의 편집장 에릭(랑베르 윌슨)에게 협박 메일이 도착한다. '디덜러스'의 첫 10페이지를 이미 인터넷에 유포했으며 돈을 보내지 않으면 뒷부분까지 공개하겠다는 내용이다. 에릭은 9명의 번역가 중 해커가 있으리라 의심하고, 번역가들을 감시, 협박하며 범인을 물색하기에 이른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실화는 아니지만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물론 실제 상황과 일말의 차이는 있다. '인페르노'의 번역가들은 번역 일을 하는 동안에만 벙커에 있었고, 번역한 원고를 제출한 뒤에는 버스를 타고 지정된 호텔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실제 상황보다 극단적으로 상황을 설정해 폐쇄적인 벙커 속에서 점차 폭력적인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는 번역가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플롯을 설정한 것이다.

이 설정 덕분에 9명의 번역가들과 편집장 에릭 사이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시종일관 김장감을 유지하게 되면서 고전 추리극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감독이 영화 곳곳에 다양한 상황을 설정하고 상상을 하게 만드는데 주어진 틀 안에서 상상을 하는 관객들은 차츰 밝혀지는 진실과 예상을 뒤엎는 강렬한 반전은 극의 방점을 찍으며 관객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다.

또한 개성 넘치는 각 나라의 번역가 캐릭터들을 주제로 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한다.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유명 번역가들을 밀착 취재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번역가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번역’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이라는 뜻이다. 단순한 작업으로 보일 수 있지만, 번역의 무게는 사전적 정의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떤 번역본은 원작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번역을 잘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도 있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기 어려운 번역가는 당연하면서도 씁쓸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감독은 깨달았다. 무엇보다 번역가들은 그들이 해내는 일에 비해 처우가 너무 좋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화는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감독은 번역가들의 삶에 대한 휴머니즘을 담아냈다. 영화의 한 겹씩 벗겨보면 그들의 속내를 담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 번역가에 대한 애정, 대형 출판산업에 대한 비판, 모든 창작자들에 대한 존경까지.

“번역가는 대리인의 인생을 사니까. 아무도 기억 못 할 이름으로. 늘 관심 밖이고, 표지에 오르지도 않고.”라는 편집장 에릭의 가벼운 비아냥은 사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잘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영화 시작 전, 스크린에 관객들은 지금껏 본 적 없던 안내 문구가 뜬다.

‘각 언어별로 자막 색상을 다르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주 언어인 프랑스어를 비롯해 유출된 소설 '디덜러스'의 번역이 진행되는 영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중국어 총 10개의 언어가 등장한다. 중국어는 빨간색, 스페인어는 노란색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각 나라 별 국기의 색이 입혀져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9명의 번역가’ 번역가 황석희의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극의 내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자 번역이라는 일과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번역가들의 열정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자 새롭게 시도했다고 보인다.

번역가들이 자신들을 의심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에릭을 앞에 두고 에릭은 알아들을 수 없는, 서로 소통 가능한 언어로 대화하며 그를 대응할 방법을 강구하는 장면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 자체가 스릴러 장치로 역할한다.

그 덕분에 의심과 갈등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관객들은 어느 나라 언어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극의 흐름을 따라가니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몸소 느낄 수 있으며 스릴러라는 장르적 즐거움도 배로 느낄 수 있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추리 영화의 고전적 수법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비틀면서 익숙함과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관객들은 시종일관 김장감을 유지하며 고전 추리극의 즐거움과 트렌디한 영상미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순수한 창작자의 시선과 문학을 다른 식으로 접근하고 갈망하며 탐닉하는 사회 구조의 시스템을 표현하며 구도와 관계를 통해 펼쳐지는 흐름에 빠져들게 몰입하게 만든다. 다소 뻔한 장르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미덕이 숨겨져 있다.

김민주기자 kmj@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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