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 코미디가 시대와 만나는 어떤 방법
[백정우의 줌 인 아웃] 코미디가 시대와 만나는 어떤 방법
  • 백정우
  • 승인 2022.09.15 21: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정우의줌인아웃
영화 ‘육사오’스틸컷.

확실히 해두고 시작하자. 유실물법과 점유이탈물횡령죄 같은 심각한 법률용어를 들이댄다는 건 이 영화를 우습게 본(아무리 웃기는 게 목적이라해도) 거다. 남한병사가 주은 로또가 1등에 당첨되었으나, 바람타고 비무장지대를 넘어가 북한병사 손에 들어갔다. 당첨금이 무려 57억. 여기서 핵심은 누구도 로또를 돈 주고 사지 않았다(정확히는 주류회사에서 홍보용으로 손님에게 나눠준)는 점이다. 박규태 감독의 ‘육사오’는 로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북한 군인의 좌충우돌을 맛깔나게 버무린 소동극이다. 오랜 시간 영화시나리오를 써온 감독의 내공이 곳곳에서 빛나는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현실적 이미지를 영화적 이미지로 바꾸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다.

영화는 남북 긴장국면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로또 한 장을 선봉장으로 삼아 씩씩하게 출발한다. 제 아무리 불굴의 투지와 강철 같은 신념으로 무장한 군인일지라도 57억 당첨금 앞에선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법. 때문에 영화는 철저하게 물신화된 이미지로 가득하다. 1등에 당첨된 로또용지가 한쪽엔 일확천금을 보장하지만, 다른 쪽엔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일까. 북한병사의 말대로 “찾아보면 남한에 일가친척 하나 쯤” 있을 테니 어떻게든 당첨금 수령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즉 남한병사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했던 당첨금 수령 가능성조차 급증한 탈북민과 인적 네트워크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정말로 북한에 있어도 로또당첨금 수령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건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다. 북한병사는 로또당첨금으로 부모님 틀니와 여동생의 가수 꿈을 실현시켜주려 하고, 남한병사는 축산농장을 갖는 꿈에 부풀었다. 중간간부는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다. 당첨금을 수령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상관없다.

21세기와 동시에 찾아온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남과 북의 병사들을 교감시킨 매개는 김광석의 노래와 초코파이였다. 스냅사진 한 장으로 남았을 뿐이지만 그곳엔 낭만이 있었다. 그로부터 22년. ‘육사오’의 공간은 자본주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시대를 보여준다. 낭만이 사라진 철책선 너머로 일확천금에 취한 의심의 눈초리만 남았다. 로또 당첨금을 수령하고 배분하기 위한 절차에 고감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개입하는 건 이 때문이다.

로또를 넘겨주는 안전장치로 감행된 인질작전. 남북의 군인이 상대방 말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모습은 웃음을 참기 힘들다. 감독은 로또라는 자본주의 첨병의 침투 공간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견고한 이데올로기 집단인 군대를 선택했고, 위험천만한 해결책을 통해 양측을 무장 해제시킨다. 꽤나 요란하고 시끌벅적하게 진행되는 영화만큼이나 모처럼의 파안대소가 부끄럽지 않다.

코미디는 당대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반영하는 장르다. 철학 가득한 풍자와 해학이 코미디의 미덕이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니다. 때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즐길 코미디 영화도 필요하다. ‘육사오’는 남과 북이 가진 해묵은 통념을 로또라는 초유의 필살기로 격파하면서 뜻밖의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남과 북 따질 것 없이 경제문제가 최우선이라는 우회적 선언. 결국, 문제는 경제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