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과거에 대한 기억이 만드는 경험들
[대구논단] 과거에 대한 기억이 만드는 경험들
  • 승인 2022.09.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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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진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인간이 동물과 다른 독특함 중 하나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기억하는 능력에 있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 난로에 도시락 데워서 먹었던 것부터, 조금 전 연구실에 창문으로 말벌이 들어와 소동을 일으킨 사건까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시간 순서대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타임머신이 없어도 그것들을 회상해내서 나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캐나다의 인지신경과학자인 “툴빙(Tulving)”은 인간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장기기억의 한 종류인 “사건기억(episodic memory)”으로 저장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저장한 사건기억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험한 것들을 회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관여된 과거 사건의 흐름을 시간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촘촘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현재’가 과거와 다른 순간임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과거와 구분된 사건으로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을 현재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과거 사건기억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에 대한 구분이 이처럼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가 있다는 것도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인식할 수 있으며, 생각을 통해 과거나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인간과 달리, 사건기억이 취약한 동물들은 감각적인 자극에 대한 욕구 판단만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반응하며 현재에 갇혀 사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동물들에게도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처럼 자신이 엮어진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은 미약하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사건기억이 가능한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상상이 가능해진다. 자신이 처할 미래의 사건을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적응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감각적 반응 속에서 현재에서만 사는 동물들과 달리, 미래를 준비하고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미래의 사건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발생할 미래 사건을 예측하며 서스펜스를 즐기는 예술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사건기억의 능력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불확실성에서 오는 걱정과 염려의 심정이 뒤범벅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의 심리학자 앱터(Apter)는 인간은 일상에서 ‘놀이적 상태(paratelic state)’와 ‘목표지향적 상태(telic state)’를 왔다 갔다 하는데, 놀이적 상태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현재-중심적이고, 현재 하고 있는 행위를 그 자체로 즐기는 상태인 반면, 목표지향적 상태는 미래-중심적이며 과정보다는 목표 달성에 관심을 갖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앱터의 말대로 인간이 미래를 생각하는 목표지향적 상태의 순간에 있을 때는 대체로 진지해지며 긴장되는 마음의 상태에 돌입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긍정적 결과만이 아니라, 불안함과 웃음이 사라진 현재를 만들며 스트레스 받는 경직된 인간의 마음을 일상에 심는 결과도 가져오는 것이다. 현재에 갇혀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동물들은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근심과 걱정을 하는 모습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사건기억을 기반으로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툴빙이 설명하는 사건기억에서 사건을 경험하는 주체는 ‘자신(self)’이다.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이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사건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이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함을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 사건들은 현재로 이어지며 그리고 언젠가 끝날 미래의 어느 시간까지만 내가 존재함을 알게 해 준다. 이처럼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철학을 하거나 과학을 하거나 혹은 종교를 통해서 그 궁금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사건기억 체계를 갖게 되며 가능해진 것이라고 본다면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관점에서 “기억하는 존재”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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