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유문화와 달구벌] 선인들, 밤하늘을 노래하며 즐겁게 삶을 살아
[신가유문화와 달구벌] 선인들, 밤하늘을 노래하며 즐겁게 삶을 살아
  • 김종현
  • 승인 2022.09.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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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달구벌, 별들의 고향
낮에 나온 반달 쪽배라는 ‘반월당’
여러 지명에도 즐겁게 지낸 삶 흔적
별을 보며 꿈을 갖고 삶의 아픔 지워
윤동주 ‘별 헤는밤’에서도 별을 동경
민족마다 고유한 새해 첫날 풍습 존재
충북서 농사철 달력 ‘눈금새김 돌’ 발견
메소포타미아달력 보다 몇 만 년 앞서
한민족이 달력 만든 것 의심 여지 없어
동심원
별이 쏟아지는 샘이란 뜻의 진천(辰泉)동을 찾아볼수 있는 곳이 달구벌이다. 그림 이대영

◇진천, 월배, 반야월…

우리들은 국속에 묻혀있는 국자처럼 달구벌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달구벌 밤하늘을 얼마나 노래했고, 즐겁게 삶을 살았는지 남아있는 지명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해가 솟아오르다가 나무에 걸렸다고 웃음을 자아냈던 동산(東山), 옥황상제의 자미원이 비춰지는 못이란 천왕지(天王池), 달이 떨어지는 곳 월배(月背), 별이 쏟아지는 샘이란 진천(辰泉), 긴 밤 지새고 떠오르는 반달이란 반야월(半夜月), 낮에 나온 반달 쪽배라는 반월당(半月當) 등의 지명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밤하늘 별빛이 물위에 쏟아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달구벌에서는 맑은 물에는 낮에도 햇살을 받으면, 밤하늘에서 쏟아졌던 별들이 물속에 숨어 있다가 햇살과 물결 따라 반짝거리고 있다. 선인들은 이를 ‘물고기의 비늘(魚鱗)’ 혹은 ‘물비늘(水鱗)’이라고 했다. 오늘날 문학적인 표현으로 ‘윤슬(윤기 흐르는 옥구슬)’이다. 달구벌에선 ‘물위 낮별(水表晝星)’ 윤슬이 유명했던 곳으로 욱수(반짝거리는물 旭水) 혹은 문양(햇살무늬 물결 汶陽)이라는 지명이 달구벌이 별들의 고향임을 말하고 있다.

1801년 4월 8일 서대문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했던 이승훈(李承薰, 1756~1781)의 6촌 형이었던 연암(燃巖) 이좌훈(李佐薰 : 1753~1770)은 남인 유생으로 태어났다. 5살 때에 시를 지었다는 천재시인으로 영남유림의 본산 달구벌을 사랑했다. 특히 달구벌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에 매료되어 ‘뭇별들이 흐르는데(衆星行)’라는 시를 남겼다. “밤이 깊어만 가는 푸른 달빛 아래, 뭇별들은 곳곳에서 휘황 찬란히 빛나는데. 작은 구름이 (저 많은 별들을) 덮겠다고? 초하루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니 별빛 더욱 유난하구나. 은하수 진주알이 무려 삼만 섬은 되겠네. 파란 유리 하늘에 모래 알알이 쏟아지듯이. (이걸 보니) 가슴에 상처딱지 하나 없이 떨어져 버리네. 원래의 기운을 찾아 더욱 힘을 내라고(群芒起虛無, 元氣乃扶持)...”로 시작해 “이런 하늘의 이치를 누가 주인이 되어 펼치는지? 내라도 곧바로 하늘에 물어봐야지(天機孰主張, 吾將問化翁)”라고 끝맺고 있다.

물론 지구촌에 살았던 많은 선인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꿈을 가졌고, 삶에서 얻는 아픔을 지웠다. 우리말로 개작한 ‘저 별을 나의 별, 저 별은 나의 별’이라는 가사는 독일의 민요 ‘두 개의 작은 별(Zwei kleine Sterne)’이다. “커다란 하늘 천막에 소곤거리며 있는 두 개의 작은 별(Zwei kleine Sterne stehen, am großen Himmelszelt), 그건 이 넓고 넓은 세상을 분명히 너와 함께 갈 거라고. 두 개의 작은 별에게 내 마지막 인사. 오~내가 떠나야만 하더라도 날 기억해줘~. 저녁 창가에서 난 나근나근 너에게 물었지? 나랑 영원히 있어 줄 거라고? 아, 나의 꼬마 녀석, 넌 (이렇게) 말했어(Ach, mein Kind, hast du gesag).” 마치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별 헤는 밤’에서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노래했듯이.

◇동짓날 쥐구멍에도 해 뜨는 달구벌

오늘날 지구촌의 달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만들어 BC 46년부터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을 1582년 그레고리오13세(Papa Gregorio XIII) 교황이 그레고리역(Gregorian Calendar)으로 개력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한해의 시작은 1월 1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마다 고유한 새해첫날(歲首)은 다르고 이를 맞이하는 풍속이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가 어릴 때는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冬至赤豆添歲).”고 하면서 ‘새해첫날(元日元旦)’ 혹은 ‘해 머리(歲首)’라고 했다. 중국고지서학을 통해서 해 머리를 살펴보면 하(夏)나라 때는 1월(寅月)을 새해 머리달(歲首月) 혹은 바로달(正月)로 삼았다. 고고학적 출토책력에 대해선 대략 39,680년 전(39,689 bp, CAL) 농사철 달력으로 사용했던 ‘눈금새김 돌(目線石, 硅質砂巖 20.6㎝×8.1㎝,0.4㎝ 간격 22개 눈금)’이 한강유역 충북도 ‘붉은해 동네(丹陽)’에서 발견되었다.

이 출토유물로 보면 BC 3000년 경 세계 최초(最初) 달력이라는 ‘메소포타미아달력(Mesopotamia Almanac)’보다 몇 만 년 전에 농사절기달력(農事節氣冊曆)을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 한민족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서지학에서도 최고기록(最古記錄)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온다. 소공17(BC 525)년 담자의 설명에 따르면 소호씨가 새 이름으로 관직제를 시행하면서 봉조씨(鳳鳥氏)를 책력을 담당하는 관직인 역정(鳳鳥氏歷正也)에 임명했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타이완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가 1954년에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선 “중국의 역법(曆法)은 한민족(東夷)에서 창시되었다. 책력(冊曆)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며, 그는 은나라(殷國, BC 1600~BC 1046) 혹은 상나라(商國)의 한민족의 조상이다. 한민족이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기는 은나라(殷國, BC 1600~BC 1046) 때는 12월(丑月)을 정월(正月)로, 주나라((BC 1046~BC 771)에선 11월(子月)을 해 머리로 했으며 동지(冬至)는 인월(寅月)에 책정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1월 1일 정월 초하루는 한나라 무제(무제, BC 141~BC 87)가 제정한 것이다. BC 104(太初元)년에 11월을 갑자월(甲子月), 동지일 야반을 갑자일(甲子日) 갑자시(甲子時)로 역원(曆元)을 결정하면서 해 머리를 으뜸새벽(元旦)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한무제의 태초력(太初曆)이었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해 머리 첫날을 원일원단(元日元旦)’이라고 표기해왔다. 천문학에서 역법이란 천체현상을 기반으로 책력(冊曆)을 발행한다. 이는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특히 황제(국왕 혹은 제후)들은 천기(天機)를 백성들에게 전하는 신령스러운 존재임(天機傳言, 自稱靈人)을 보여 주였다. 왕조의 당위성과 정권의 합리화에도 이용해 오늘날 개헌작업처럼 개역작업(改曆作業)을 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위정책력은 국가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대변했다.

별나라 별동네(辰國辰韓)에 살았던 달구벌의 선인들은 은력(殷曆, 동이족의 은나라 책력)을 지켰다. 따라서 달구벌의 선인들은 동지팥죽 한 그릇에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冬粥添歲).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쓰다가 1454(단종2)년 칠정산력(七政算曆)을 만들었으나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했으며, 1564(효종5)년에 청나라의 시헌력(時憲曆)을 받아서 시행했고, 1896(고종33)년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왕조책력 시행은 연호계수(年號繼受)와 더불어 사대주의의 2대 충성맹세증표였다. 사대충성은 i) 관제와 관복 시행, ii) 연호와 책력 사용, iii) 조공세납과 하례(문안)사 파견, iv) 제후제례 및 하명명호(下命名號, 국호, 관직명, 三爪龍) 사용 등으로 서약했다. 단적인 표현이지만 김부식(金富軾)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원인을 “겉으로 따르고 속으로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음으로 그만 멸망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망한 게 마땅했다(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고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끝맺고 있다.

글=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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