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유 문화와 달구벌] “땅이 넓어 사람 많이 살고, 누각이 높아 시야가 넓구나”
[신가유 문화와 달구벌] “땅이 넓어 사람 많이 살고, 누각이 높아 시야가 넓구나”
  • 김종현
  • 승인 2022.10.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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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거문고 곡조에 학과 함께 춤추는 달구벌
최치원, ‘칠언칠구’로 장원급제해
40세에 관직 떠나 신라강역 떠돌아
국가위기관리 관련 지식 집대성
890년대 들어 ‘경학대장’ 저술
조선 태종 때 김요, ‘금학루’에 감탄
“땅의 형세 평탄·겹친 산봉우리 둘러
큰 내가 꾸불꾸불…사방서 모이는 곳”
달구벌, 천하에 둘도 없는 구지·중지
신라호국성
달구벌에 있었던 신라호국성 팔각등루. 그림 이대영

◇호국성팔각등루(護國城八角燈樓)에서 달구벌을 바라다보면서

12살 때에 신라를 떠나서 18세에 빈공과(賓貢科) 과거시험에서 ‘사희(四喜)’라는 시제를 받아 “칠년이란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날 때 기쁨이야. 천리타향에 고향친구를 만나니 이 또한 기쁨이오. 백년가약을 하는 첫날밤에 불을 끄자 달빛이 비취니. 장원명단 게시판에 이름이 걸려 소년급제 하다니.”라는 칠언절구로 최치원(崔致遠, 857~몰년미상)은 장원 급제했다. 876년 당나라 선주 율수현위, 도통순관까지 올랐다. 일명 토항소격문(討黃巢檄文)이란 명문으로 당나라에 그의 이름을 날렸다.

최치원이 17년간 당에서 관리를 하다가 885년 29세 나이로 신라로 되돌아왔을 때 신라는 이미 붕괴하려는 수많은 조짐이 보였다. 당나라 경험을 살려서 조국을 살려보려고 상당히 의욕적으로 혁신방안을 강구했다. 894년 국가개혁방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 상신한 뒤 10년간 노력을 쏟았으나 6두품 아찬까지 올랐다. 진골귀족들에게 혁신의 기미는 손톱조차도 없었고, 어떤 변혁도 먹혀들지 않았다. 40세(897) 젊은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세상물정을 익히고자 신라강역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신라천년사직을 회생시키고자 각종 경학에서 나오는 국가위기관리 관련 지식을 집대성해 890년대에 ‘경학대장’을 저술했다. 오늘날 위기관리용어로 설명하면, i) 평소에 문제발견의식을 갖고 위험의 신호, 문제의 요인, 재난의 기미 등을 수시로 살펴보는 찰미(察微), ii) 한편으로 민심, 민정을 보살펴 끊임없는 소통을 하며(通民情), iii) 측근의 보고사항, 전문가의 자문 혹은 반대파의 의견까지 빠짐없이 들어야 한다(聽諫). iv) 하나라도 문제가 있다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한다(正百官). v) 동시에 예상되는 급변이나 재난을 대비해 응변조치를 취해야 한다(應變). vi) 제도나 관행 등에 민원이 발생한다면 ‘손톱 밑 가시’라도 고쳐야(改過)한다. vii) 빠른 시일 내로 민심, 사회 및 국가가 안정하게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아야(守常)한다.

달구벌에서 육두품알찬으로 호국성 도의장군을 역임했던 이재(異才)는 신라천년사직의 연명을 위한 기원불사로 909년 6월 팔각불등루각을 남쪽고개에 세웠다. 누각기문을 최치원에게 부탁하자, 신라골품제에 대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있었기에 쾌히 승낙했다. 그는 52세 명문장으로 달구벌의 정취, 풍광 및 당시 시대상황을 기문에다가 쏟아 놓았다. “이 성의 서쪽에 불좌(佛佐, 용두방죽)라는 둑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불체지(佛體池, 대불지)가 있고, 동쪽에 천왕지(天王池, 서문시장)가 있다. 그곳엔 옛 달불성, 그 성의 남쪽엔 불산(佛, 大德山)이 있다.”라는 묘사를 쫓아가면 남령은 오늘날 연구산(連龜山)이라고 추정된다.

달성토성은 랜드마크였던 모양이다. 이를 모성으로 용두토성, 봉무토성, 검단토성, 고산토성이 있었고, 주변산성으로는 용암산성, 팔거산성, 대덕산성, 환성 등이 있었다. 여러 여건상 팔각등루가 있었던 곳은 검단토성으로 비정(比定)된다. 천왕지가 태극천원임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금학루(琴鶴樓) 밝은 달빛은 누가 다 가지겠나?

오늘날 대구 중구 대안로 50번지(校洞) 대구읍성 밖 옛 대구부 히가시혼마치(大邱府 東本町) 달성관에서 동북쪽 모퉁이에 거문고 가락에 학이 춤춘다는 천상의 누각(琴鶴樓)이 있었다. 조선 태종 때 김요는 “거문고 소리 은은함에 화답이라도 하듯, 남풍에 세상시름 날려버린 듯 즐거움이 찾아드니, 그 이름이 금학루라고 함이 맞도다.”고 명불허전임을 감탄하면서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친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꾸불꾸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라는 기문을 적었다. 또한 세종 때 강진덕은 “땅이 넓어 사람 많이 살고, 누각이 높아 시야가 넓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날아가고 거문고는 달과 어울려 맑네.”라고 시구를 적었다.

이어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금학루에 올라 달구벌 산천에 뜨는 한가위 보름달을 보고 일필휘지하여 “해마다 열 두 번이나 보름달이 뜬다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한가위보름달이라 너무나도 둥그네. 한 가닥 길게 바람이 불어오더니 구름을 쓸어다버리네. 이곳 누각엔 티끌 하나 남아있을 리 없겠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보다 방랑시인 김삿갓(放浪詩人 金笠)으로 더 알려진 그는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풍월 한 수를 지었다. “험준하게도 높이 솟아오른 팔공산, 발길 막고 있는 장벽이라 동남쪽 어디로 가야할까? 부득이 이렇게 많은 풍광을 다 읊지 못하기로. 자연에 비해 초췌함이란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라네.”

세월이 흘려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선비들은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았다. 정사철은 ‘임하실기(林下實記)’에서 팔공산여행하다의 시운을 빌려서라는 시제로 “죽장망혜(竹杖芒鞋)하고 팔공산에 오른다니. 큰 바위 옆문 깊은 그곳은 흰 구름 포대기에 싸여 있네. 높은 산에 오르는 비결은 자네는 알겠는가?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정상에 오른다지.”

◇두사충이 알아본 명당 달구벌

당시 명나라에서 이여송을 사령관으로 조선에 대명지원군이 파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린(陳隣)의 장인이며, 정보장교 수륙지획주사를 담당했던 두사충(杜師忠, 생몰연도미상)은 종전 후 조선에 귀화해 이곳 달구벌에 뿌리를 내렸다. ‘두사충 결산도(杜師忠訣山圖)’ 작전도에서 보듯이 달구벌 지형지물에 해박했다.

그는 달구벌을 처음 답사하고 최치원이 ‘곤방으로 옛 성이 이어짐’이란 표기에서 암시했던 천기(天機)를 품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 천기란 후천팔괘를 그려놓은 것 같은 신라호국성의 축성전략이었다. 바로 태극엔 달성토성을, 손하절(巽下絶)엔 검단토성, 곤삼절(坤三絶)엔 고산토성, 감중연(坎中連)에 팔거산성 그리고 이중허(離中虛)에 봉무토성을 축성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손자병법 구지편을 달통한 병법지리대가임을 자타공인했던 그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구지(衢地, 軍事的要衝地)이며, 중지(重地, 軍事兵站基地) 또한 위지(圍地, 藏風得水)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곳 하루에 천 냥의 부가 쏟아지는 좋은 길지(日益千富之處)에 경상도후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1601년에 경상감영이 도호부와 같이 터를 잡았다. 그의 해박한 지리적 작전정보로 승전을 얻은 이순신 장군은 ‘두복야 선생께 드림(奉呈杜僕射)’라는 시를 적었으니 “북진으로 가서도 우리 같이 고생을 했고, 해동조선으로 와서 생사를 같이 하게 되었구려. 성곽 남쪽이 타향이겠지만 달밤 아래에 어름푸시. 오늘밤은 우리 술 한 잔 하면서 옛정을 나눠 보세나.”라는 주련시(柱聯詩)가 수성구(범어동) 모명재(慕明齋) 기둥에 지금도 걸려 있다.

한편, 제1차 정한전쟁에서 실패한 일본은 동양이 대동단결하여 공동번영을 누리자는 大東亞共榮을 슬로건으로 한반도를 다시 공략하여 달구벌 땅 대구에다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이곳을 전초기지로 민족자원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을 감행했다. 이에 저항하던 젊은 이상화 시인은 1926년 개벽 6월호에‘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발표했다. 즉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1950년 일본에게 ‘신의 축복’을 안겨다주는 남북동란이 터졌다. 이곳 달구벌엔 1949년 37만명이던 인구가 갑작스럽게 200만 명이나 넘어 당시 표현으로 통시 구더기처럼(like maggots) 바글거렸다. 김원일이 1988년에 쓴 ‘마당 깊은 집’ 장편소설에는 “골목길 가쟁이(섶)에는 덮개조차 없는 하수구가 나 있어, 겨울 한철을 빼고는 늘 시궁창 냄새가 났고, 여름이면 분홍색을 띤 장구벌레가 오골(오물)거렸다는 장관동은 한편으로는 삼사십평(30~40평)의 나지막한 디귿(ㄷ)자 형 기와집이 태반이었던 부자동네였다.”로 묘사됐다. 우리의 선인들은 달구벌에서 시궁창 장구벌레처럼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오물거리면서 살았던 한때가 있었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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