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세련됨과 순수함에 대하여
[문화칼럼] 세련됨과 순수함에 대하여
  • 승인 2022.11.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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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칼럼니스트

얼마 전 끝난 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WOS)의 대미를 '김선욱&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WOS 비르투오소 챔버'가 장식했다. 개막공연인 조성진, 사이먼 래틀&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대단한 스타성을 지닌 아티스트들의 향연이었다면 마지막을 장식한 두 연주는 상대적으로 소박하지만 내면에 충실한 공연이었다. 김선욱과 함께한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가 '세련됨'이었다면 WOS 비르투오소 챔버는 '순수함'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김선욱 협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호흡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김선욱은 음악을 덤덤히 끌고 간다면 지휘자는 상대적으로 더 세심한 배려(?)를 한다고 느껴졌다. 우크라이나 출신 지휘자 키릴 카라비츠와 김선욱은 소문난 음악의 동반자다. 그리고 이미 많은 중요한 경력을 쌓으며 떠오르고 있는 지휘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임이스트 같았다. 그 음악에 가장 어울리는 동작으로 음악을 이끌어 나갔다. 가끔씩 동작이 과한 지휘자를 볼 때도 있지만 카라비츠는 너무 적절하면서도 절도 있게 음악을 표현해 낸다.

나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음악과 인간적 면모에 있어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지휘자로서도 훌륭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잘 나갈 때 그는 '과연 10년 뒤에 내가 계속 무대에 설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자신의 음악을 담금질하던 속 깊은 젊은이였다. 그리고 지휘공부를 하면서도 섣불리 무대에 오르지 않고 무르익을 때 까지 진중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다니엘 바렌보임처럼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두 영역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오래토록 관객들과 교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40명 정도의 단출한 구성으로 들려준 베토벤 사운드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는, 베토벤 음악에 딱 알맞은 사운드였다. 그래서 이날 연주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감정이 세련됨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연주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순도 높은 세련됨을 들으며 우선은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어 행복했지만 한편은 무거운 회한에 젖기도 했다. 이처럼 수준 높은, 세련된 아티스트의 예술세계를 다루는 예술행정가였던 나는 과연 수준 높고 세련되었던가? 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부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역시 단정하고 깔끔한 연주였다. 특히 4악장 도입부의 폭발적 사운드는 그랜드 홀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나는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 필의 열성팬이라고 자부한다. 그들의 내한 연주는 경향(京鄕)을 가리지 않고 가서 보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연주는 몇 년 전 대구 콘서트하우스에서의 음악회였다. 50명 정도의 편성이었지만 정말 풍부하고 완성도 높은 사운드였다. 그날의 메인 곡 슈베르트 9번 교향곡 '그레이트'는 정말 그레이트 했다고 이 지면을 통하여 표현한 적이 있다. 유럽 챔버의 음악을 들으며 그 때와 같이 기대 이상의 감동을 받았다.

WOS 마지막 날, 미세먼지가 가득한 대기를 씻어 내리려는 듯, 가을비가 살짝 내린 휴일 늦은 오후 콘서트하우스 그랜드 홀에서는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WOS 비르투오소 챔버의 연주로 울려 퍼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이 음악을 무대에서 듣기는 쉽지 않다. 이날 비르투오소 챔버는 이름그대로 비르투오소를 지향하는 단체답게 완성도 높은 연주를 했다. 그것도 상설단체가 아닌 프로젝트 연주 단체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쉽게 다룰 수 없는 음악에 순수한 열정으로 도전한 이들의 연주를 들으며 '순수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1번 협주곡의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햇빛에 가려져 있던 별빛이 해가 기울자 영롱히 빛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단원 한 명 한 명의 음악이 바흐의 작품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악기 중심에서 다양한 독주악기들이 함께해야 하는 만큼 연습과정도 지난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서로의 소리를 듣고 배려하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그들을 통하여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비르투오소 챔버 단원들은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비르투오소 챔버의 이름으로 모여 작은 역사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역에서 이 정도 완성도 높은 앙상블을 듣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년, 재작년에도 큰 반향이 있는 공연을 보여줬다. 다만 처음 두 해와 달리 올해는 한 번의 연주로 그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WOS 비르투오소 챔버는 대구의 훌륭한 자산이 될 잠재력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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