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이기봉 'Where You Stand'展
국제갤러리, 이기봉 'Where You Stand'展
  • 황인옥
  • 승인 2022.11.2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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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그림 위 얇은 아크릴판
현상과 인식의 괴리 가시화
물안개로 혼란한 내면 표현
부산점에 그림자 연작 전시
주체 지워내면서 현현 부각
이기봉작가
이기봉 작가.

이기봉작WhereYouStandGreen
이기봉 작 ‘Where You Stand Green’. 국제갤러리 제공

인간이 첫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의 상태는 순수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환경이나 경험, 지식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순수는 장막에 가려지고 후천적인 자아가 자리를 잡는다. 그로 인해 인간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국제갤러리 서울점 K1, K2와 부산점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기봉 작가는 최근 열린 전시 개막식에서 “인간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후천적인 자아에 의해 가려진 ‘막’으로 인해 어렴풋이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였다. 그는 캔버스 바탕에 풍경을 그리고 그 위에 폴리에스테르 천이라는 장막을 씌우며 인간이 불완전하게 인식한 세계를 가시화한다.

세계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로 맞물려있다. 물리적인 세계는 눈으로 식별이 가능하지만, 비가시적인 세계는 마음의 영역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다. 작가는 “감각으로만 이해한 세계보다 마음으로 인식한 세계여야 세상이 특별해진다”는 논리를 폈다. 역사, 지식, 사유 등이 축적된 내면으로 세계를 이해할 때 더 깊이 있게 본질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게 ‘마음’이 곧 ‘세계’였다.

그가 마음으로 인식한 세계는 ‘풍경’으로 가시화된다. 주로 물가의 안개 낀 풍경을 선호한다. 그에게 안개는 신비스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있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세계가 관계 맺는 메커니즘에 대한 가시적인 대상으로 다가왔다. 화면은 안개 낀 새벽이나 밤 풍경을 떠올리는 풍경들로 구축되는데, 물이나 안개라는 장치 때문에 분위기는 몽환으로 흐른다. “화면 속 풍경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복잡성이 발생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작가는 ‘몽환적’인 상태를 인간 내면과 연결 짓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그로인해 내면은 혼돈 그 자체”다. 그는 맑음과 탁함, 고요함과 어수선함이 혼재한 상태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다양한 지층들로 층층이 쌓여져 혼돈된 내면을 안개를 매개로 몽환적으로 표현한다.

작업은 2단계로 진행된다. 캔버스에 먼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다. 이후 1㎝ 위에 플렉시글라스(얇은 아크릴 판) 또는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겹쳐 올리고 물안개 자욱한 표현을 추가한다. 천 아래 풍경은 실재 풍경이며, 천에 의해 가려진 풍경은 인간이 각자의 인식체계로 이해한 불완전한 풍경이다. 안개와 평면에 놓인 복수의 화면은 거리감을 뒤섞고 인식체계를 교란시킨다. 천위에 알파벳을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언어나 지식이 인간의 의식을 가리는 현상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표현에 해당된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화면 너머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인간이 저마다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일상적인 행위와 일맥상통 합니다.”

몽환적인 물가 풍경을 겹으로 표현한 지는 10여년 됐다.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기 위한 그 어떤 내면적인 행위보다 “움직임 자체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실체가 아닐까?”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몸의 실재성을 감각케 하는 것, 즉 몸과 눈으로 이 세상과 충돌하며 지각하려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본성이며,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그가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내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내용은 부차적인 것이고 핵심은 움직임에 있지 않나 싶어요. 머리 꼭대기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작용하는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세계들이 드러나거든요.”

그가 “이제는 열매가 보이기 시작 한다”고 했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작가론이었다. 내용은 “지금은 꽃보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었다. 꽃을 피울 때보다 더 많은 영양분과 분투가 필요한 시기라는 의미였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열매의 본성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계속해서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움직임만 해서는 안 되고, 세상에 내어주는 작가가 되기 위해 저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서도 눈에 띄었다. 전업 작가가 되자 성공도 빨리 찾아왔다. 지금도 안개 핀 물가 풍경 연작은 해외에서 꽤나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10여 년 전 그는 슬럼프에 빠졌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력감에 빠졌고, 전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작업은 계속했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2016년에 교수직도 그만두고 지금은 작업에만 매진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작업이 깊이가 더해지고 있는 배경이다.

그의 작업에서 물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2003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때다. 당시 그는 푸른 물을 담은 수조를 등장시키며 직접적으로 물의 형태를 드러냈다. 순간적이고 가변적인 안개나 수증기가 등장한 것은 2008년부터다. 습기가 많은 산 중턱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30여년간 지내다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시각적인 언어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이번 서울점 전시에는 그간 꾸준히 작업해온 안개 속의 몽환적인 물가 풍경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K2의 2층 전시작에서는 작가와 대상 간의 거리감을 더욱 부각함으로써 관람자와 안개 너머 사이의 공간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걸었다. 부산점에서는 창가에 비친 그림자를 그린 연작이 걸렸다. 주체가 없는 그림자만을 그린 이 작업들 역시 실재가 아닌 실재로부터 발생하는 하나의 불완전한 현상이자 현현이다.

1957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와 서울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 독일 ZKM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Where You Stand’전은 12월 3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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