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미술가 신경하 개인전…박물관이야기 내달 12일까지
섬유미술가 신경하 개인전…박물관이야기 내달 12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2.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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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미술은 재료부터 제어 가능해 매력”
선 잇고 면 만들면 마음 비워져
작업 방식은 슬래시 기법이 기본
흰색·검정·회색 등 무채색 사용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인식 낮아
가공·염색 등 전 과정 의지 투영
직선서 고요·무책색서 품격 발견
신경하작-내안의나7
신경하 작 ‘내 안의 나Ⅶ ’
신경하작-비움의나7
신경하 작 ‘비움의 나Ⅶ’
신경하작-비움의나4
신경하 작 ‘비움의 나Ⅸ’

자연에게서 얻는 지혜 중 으뜸은 채움과 비움의 미학일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철저하게 채움과 비움의 연속이다.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면 걸치고 있던 모든 것을 떨궈낸다. 다가오는 새봄을 채우기 위한 가을의 비움이다.

섬유미술가 신경하에게 비움과 채움은 자연의 질서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비움이 곧 채움이 되고, 채움이 곧 비움이 된다. 말 그대로 채움과 비움이 씨실과 날실처럼 하나로 묶여있다. 그의 손끝이 스쳐 가면 말갛던 천에 아름다운 패턴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아가고, 패턴의 수만큼 마음 속 상념들 또한 자취를 감춘다. 천이 형상으로 채워져 가면 마음의 번뇌는 그가 채운 형상의 넓이만큼 사라진다.

그에게 “작업은 곧 비움을 위한 수행”인 것이다. “반복적으로 선을 잇고 면을 만들고 채워져 가는 과정에서 마음과 정신은 비워집니다.”

섬유 작가 신경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박물관 이야기(대구 중구 태평로)에 그의 예술정신이 배어있는 섬유미술작품 2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작업의 재료는 가볍고 투명하며, 약간의 빳빳한 직물인 오간자. 오간자에 작가의 예술혼을 투영한다. 투명한 성질에 주목하고 검정과 흰색, 회색을 변용해 오간자에 염색을 하고, 염색한 천을 겹치고 자르는 방식으로 패턴을 만들어간다.

섬유로 제작한 미술 작품이지만 시각적인 완결성으로 보면 회화다.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섬유 작업에 차용하고 있다. 평면인 오간자를 자르거나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반복적인 선을 만들고, 선들의 집적으로 면을 구축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다양한 패턴들이 자리를 잡아간다. 겹쳐진 오간자를 잇기 위해 바느질을 행하기도 하는데, 바느질땀은 회화의 기본 요소인 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점, 선, 면은 저만의 조형언어가 됩니다. 그것은 관념이기도 하고, 시각적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독창적인 표현방식이기도 하죠.”

작업 방식은 슬래시 기법을 기본으로 한다. 슬래시 기법은 섬유를 중첩하고 잘라내서 문양을 내는 기법으로, 중세 시대 옷 제작 방식에서 유래했다. 그는 오간자 섬유를 겹치고, 원하는 지점에서 자르고, 자른 선들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슬래시 기법을 진행해간다.

오간자 섬유에 자신만의 패턴을 만들어가는 그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겹침이다. 반투명한 오간자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염색한 오간자를 겹친다. 이때 반투명한 성질 때문에 겹쳐지는 부분은 색이 짙어진다. 겹쳐져 중첩되며 짙어지는 특성을 활용해 패턴을 만들어간다. 형태에 따라 겹쳐진 오간자 전체를 사선으로 자르고 잘려진 선들을 바느질로 잇기도 하고, 특정한 부분만 자르고 고정시키기도 한다.

“슬래시 기법은 중세 시대에 몇 겹의 오간자가 겹쳐졌는지는 옆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색은 무채색인 흰색, 검정, 회색만 사용한다. 세 가지 색을 5개의 색으로 분화해 겹치는 방식으로 밀도를 더해간다. 화려한 색채를 구사할 수도 있지만, 무채색을 고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저와 가장 닮은 색이 무채색인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화여대에서 섬유디자인 석사를 거쳐 동대학 섬유예술 박사를 졸업하고 한양여대에서 섬유패션디자인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섬유미술의 역사가 짧은 국내에서 섬유미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섬유미술이 가진 가능성 때문이었다. “섬유야말로 유연하고 따뜻하고 섬세한 물성이며, 항상 접할 수 있고 친근하다”는 점에 매료됐다.

화화 못지않게 발전된 분야로 인식되고 있는 해외와 달리 섬유미술에 대한 국내 인식은 낮다. 섬유 미술을 옷 제작 전 단계의 과정 정도로 치부하거나, 패션의 일부로 인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에게 섬유미술은 무궁무진한 분야로 다가온다. 그는 가공부터 염색, 재직, 프린팅까지 전 과정에 작가의 의지를 투영할 수 있는 분야로 섬유미술에 주목한다. 실제로 그는 전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한다.

“미술에서 물감이나 캔버스천 등의 원재료를 직접 제작하지는 않지만 섬유미술에선 그 모든 것을 작가가 직접 원하는 방향으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작업에서 얻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작업할 때 느끼는 치유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병마로 힘겨웠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몇 년 전, 큰 병이 찾아왔고 그는 절망했다.

투병 중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어느 책 속이 글귀였다. “책에서 ‘행복은 마음에 의한 선택의 문제’라는 글귀를 보고 생각을 바꿔 먹고 투병 중에도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이 제게는 힐링이었던 거죠.” 슬래시 기법도 투병 중에 시도한 변화였다. 무채색 계열에 대한 선호 역시 그때 시작됐다.

곡선보다 직선에서 고요함을, 화려한 색채보다 무채색에서 품격을, 붓과 캔버스가 아닌 칼과 바느질과 반투명한 섬유에서 예술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그의 예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내면의 반영’이다. 모든 예술이 예술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공식이 그에게도 오롯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의 섬유미술은 곧 작가 자신이었다. “작업은 내면에 있는 나와 만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처럼 그에게 섬유미술은 작가 자신이었다. 전시는 3월 1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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