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다음 소희’는 없어야…
[데스크칼럼] ‘다음 소희’는 없어야…
  • 승인 2023.02.2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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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뉴미디어부장
‘should have p.p.’ 학창시절 별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외웠던 가정법 과거완료다. 이는 ‘과거에 ~했더라면’과 같이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를 나타낸다. 뉴스를 통해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면 이상하게 이 표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난 주말 아침잠을 포기하고 찾은 영화관에서 ‘다음 소희’를 보고 나오면서 또다시 이 표현이 맴돌았다. 영화 ‘다음 소희’는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간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유진’이 그 이면에 숨어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마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가 더 아픈 것은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전주의 한 특성화고 학생 홍 모양이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학생 개인의 문제로 묻히는 듯했으나 SBS ‘그것이 알고 싶다-특성화고 현장 실습생 사망사건’편을 통해 그 이면에 숨겨진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원래 현장실습은 이름 그대로 취업과 연계하기 위한 전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애완동물과를 전공한 홍양은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콜센터로 실습을 나간다. 이때 홍양이 근무한 부서는 자사의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을 설득해 계속 서비스를 이용하게 하거나 다른 서비스를 권유하는 업무를 맡는 세이브팀, 해지방어부서였다. 고객의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야 해 일명 욕받이 부서로 불리며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 기존 근무자들도 기피하고 퇴직율도 높은 부서다. 영화 속 표현을 빌면 670명이 근무하는데 한 해에 620여 명이 그만둘 정도로 쉽지 않은 업무다. 기업에서는 그 빈자리를 현장실습생들로 손쉽게 채워나간다. 실습생들은 때로는 성희롱 발언과 폭언에 시달리며 그날 받은 콜수와 해지방어 숫자로 평가받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어야만 했다.

‘힘들면 그냥 그만두면 될걸,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영화를 보는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교사는 “내가 여기 뚫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포기하고 돌아오면 취업률이 떨어질까 학생들을 압박하고, 기껏 뚫은(?) 회사에 다른 학생들을 보내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실습을 포기하고 돌아온 아이에게는 빨간 조끼를 입히거나 빨간 명찰을 달게 하는 등 패배자 낙인을 찍어 아이들이 쉽게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업체에서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힘이 든다고 현장실습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다. 학교에서는 현장실습을 내보내면서 근로기준법이라던가 부당지시가 있을때 어떻게 거부해야 되는지에 대한 교육보다는 학교에 누가 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학교 입장에서는 현장실습은 취업률로, 취업률은 정부지원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취업률에 담보잡힌 그들에게 주어진 노동의 질이나 업무환경, 전공과의 연관성을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고가 생기고 나면 노동부는 교육부에, 교육부는 노동부에, 학교는 현장실습기업에, 현장실습기업은 학교에 서로 책임을 미루기에 급급한다. 국가에서도 여러가지 제도를 내놓지만 안타까운 사고는 여전히 반복이 된다. 일련의 사고를 겪으며 2017년에는 조기취업형태의 현장실습제도를 폐지했지만 1년만에 슬그머니 부활했다. 물론 기업에는 안전강화를, 학교에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라는 등의 요구를 했지만 실제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기준을 까다롭게 하면 기업들은 실습생을 받지 않으려고 하고 학생들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이유다.

지난 8일에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는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며 18일 누적관객수 6만명을 돌파했다. 영화 한 편으로 하루 아침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희’의 죽음에 뒤늦게나마 관심을 기울인 ‘유진’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이 늘어나기를, 또한 ‘다음 소희’가 나타나지 않게 좀 더 현실적으로 제도가 개선되기를 바라본다.

해마다 이맘때면 교문 위에 대학진학률이나 취업률이 적힌 현수막이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무심히 지나쳤던 그 풍경이 이제는 편치 않다. 또다시 ‘그때 이렇게 할 것을’과도 같은 뼈저린 후회와 함께 사후약방문을 쓰는 일은 없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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