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현 작가 개인전…갤러리 CNK 내달 30일까지
박정현 작가 개인전…갤러리 CNK 내달 30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2.27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러난 일부만으로는 실체 파악하기 힘들어”
표절 7년 법정공방 끝에 기각
‘지혜를 구하다’는 답답함 대변
“관람객 참여 불편함 해소되길”
순수-디자인 통합 양측 만족 시도
작품 곳곳에 동양철학 배어 있어
주제는 무겁지만 간결·유머 추구
wisdom
박정현 작 ‘Wisdom’에 물내림 버튼을 누른 후 물이 빠지면서 글자가 드러나는 과정을 촬영한 모습. 갤러리 cnk 제공

국내 미술계의 눈이 쏠렸던 표절 논란 이후 여는 첫 개인전에 목까지 차올랐던 못다 한 말들이 분출했다. 물론 작품을 통해서다. 2014년 대구미술관 기획 ‘Y아티스트 : 박정현’전에 출품한 고무줄을 이용한 작품 ‘방해(disturbing)’가 표절 분쟁에 휘말렸고, 7년만의 긴 법정 공방 끝에 2021년 부산고법이 부산의 모 작가가 박정현 작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비록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법정 다툼 기간 동안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예기치 않았던 많은 상처들 또한 적지않게 맛봐야 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그가 “조급한 마음에 설명을 할수록 상처가 커졌다”며 “침묵의 힘이 강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했다. 미술계가 주목하는 억울한 일을 겪으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상처만큼 성숙해 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그가 겪었던 힘겨웠던 일들을 작업으로 승화한 지점은 아픔이 선사한 역설이었다.

승소 후 여는 첫 개인전인 갤러리 CNK 개인전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밝았다. 이제는 작품을 통해 차분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보였다. 하지만 작품에 담긴 의미들은 폐부를 찔렀다.

숨겨진 91.7%와 드러난 8.3%를 일컫는 전시제목 ‘0.917-Unspeakable(말로 표현할 수 없는)’에 그의 정제된 분노가 반영돼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은 수면 아래 잠겨있는 91.7%에 비해 8.3%에 불과하다는 것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그가 법정 공방 시기 뿐만 아니라 평소에 표면 아래 가라앉은 진실보다 표면에 노출된 작은 조각들이 진실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목도하며 은유적으로 착안한 제목이다.

“대부분이 가려지고 극히 일부만 드러난 것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이번 전시 제목에 투영했어요.”

이번 전시에는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과 이전에 선보였던 시리즈의 진화된 버전 등으로 구성됐다. 2층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작품 ‘SEEK WISDOM(지혜를 구하다)’은 작가의 답답했던 심정을 대변하는 신작이다. 변기의 구조를 연상하는 장치에 물이 일정부분까지 차올라 있고 ‘SEEK WISDOM‘이라는 글자가 상단에 설치되어 있다. 물이 차면 글씨의 8.3%만 노출되어 읽히지 않지만, 물 내림 버튼을 누르고 물이 빠지면 글자의 전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구조로 제작됐다.

그가 “목까지 차올랐던 답답한 심정을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SEEK WISDOM’은 관람객 참여형 작품이다. 관람객이 물내림 버튼을 직접 조작할 수 있도록 열어뒀다. “저처럼 관람객들도 물을 내리면서 각자가 가진 ‘그들만의 답답함’을 해소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했어요.”

그가 지금까지 다뤄왔던 주제는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였다. “탁자와 의자 등의 설치작품이나 고무줄 작품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불편함을 상기하고, 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해 왔어요.” 수평을 합목적으로 하는 탁자나 바닥을 비대칭으로 만들어 편안한 상태를 전복해 무위(無爲)에서 인위(人爲)로 점점 나아가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거나,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팽팽하게 얼키설키 연결한 고무줄 작업에선 네트웍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꼬집기도 했다.

수평은 탁자나 의자가 갖는 합목적성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간은 탁자와 의자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어딘가에 음식을 놓았고, 어딘가에 앉았다. 대개 바위나 돌, 쓰러진 나무들이 현대의 탁자와 의자를 대신했다. 인간이 자연의 모양을 이해하고 자신의 몸을 자연물에 맞춰 스스로 균형을 맞췄던 것이다. 그는 문명 이전의 인류에 비해 현생 인류가 편안한 상태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분명한 이유는 있다. “편안함은 긴장감을 뺏어가고, 새로운 발견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완벽에 대한 반항이자, 순수예술과 디자인의 경계허물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효용물은 기능성을 합목적성으로 하는 디자인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는 디자인에서 실용성과 순수예술에서 순수를 제거하려 한다. 그 둘의 근원을 거슬러 가면 디자인과 순수 예술이 하나에서 비롯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순수예술은 너무 관념적으로 변했고, 디자인은 너무 기능적이 됐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하루가 지나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작품이 나오고, 디자인도 싫증이 나면 금방 새로운 디자인이 나옵니다. 디자인은 인간을 쫓아다니고, 인간은 순수 예술을 이해하려고 쫓아다니는 상황이죠. 그 모두 인간의 욕망이 부른 결과죠.” 그는 디자인과 수순예술 그리고 인간과의 상관관계에서 순수예술과 디자인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으로 양단을 모두 만족시키려 시도한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된 ’Flag(깃발)‘ 연작은 불편함과 편안함 사이의 긴장감을 극대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태극기에 쓰인 네 괘인 건괘와 곤괘와 감괘와 이괘를 통틀어 일컫는 ’건곤감리(乾坤坎離)‘를 조형적으로 배치하고, 각 괘의 밑바탕에 애국가를 새겼다. 하지만 그 역시 8.3%만 노출해 해독이 불가하도록 했다.

신작인 ‘Tables embrace’은 불편한 탁자 작업의 변형된 버전이다. 철제로 20cm 규격으로 수평을 다양한 방식으로 거스른 탁자들을 벽에 열을 지어 설치한 작품이다. “법정 공방을 펼치면서 수면 아래 가라앉은 진실은 진정한 대화만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번 작업에 그 경험들이 녹아들었어요. 불편함과 편안함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던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지만 보다 심화됐다고 할 수 있죠.”

작품 속 주제는 무겁지만 그가 구현한 시각적인 조형들은 간결하고 지적이다. 어떤 지점에선 해학적인 유머도 내비친다. 주제를 서술하는 그의 역량이 노련하다는 이야기다. 괄목할 점은 건곤감리의 괘로 구성된 형상에서 산수화의 그림자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각 괘와 함께 짧고 얇은 직선 몇 개를 한켠에 배치하는데, 마치 풍경에 내리는 비 같다. 출발이 동양화라는 점이 은연중에 배어나온 결과다.

“동양화를 전공해서인지 조형적인 면에서 산수화 느낌을 본능적으로 구사하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주역을 이루는 구성요소인 건(乾) · 곤(坤) · 감(坎) · 리(離)를 조형적이자 철학적인 기반으로 차용하거나, 자연의 질서를 인간에 적용하거나 균형 잡힌 사고인 중용(中庸)을 추구하는 등 그가 지향하는 일련의 가치들은 동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작정하고 동양철학에 심취한 것은 아니지만 동양화에 배어있는 사상적인 기반들이 자연스럽게 저의 작품에서 녹아들고 있습니다.”

그가 “건축가가 평생 자기가 설계한 건축물을 하나도 지어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래서 디자이너를 병행한다”고 언급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그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설계도대로 작품을 공간 속에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에 뿌듯해 한다. 그에게 공간은 작업의 일부이자 작가로서 느끼는 즐거움의 일부다. 설치작업이든, 회화 작업이든 공간과의 밀당과정에서 파생되는 긴장감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긴다.

“작가들도 작품을 설치하고 싶어 하지만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은 건축가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지금까지 저의 작품이 세상에 보여지고 소통할 수 있어 감사하죠. 특히 이번 전시는 무거운 짐을 벗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현재의 근황을 저의 작품으로 소개할 수 있어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전시는 3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