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득용 작가 개인전…갤리리 팔조 내달 9일까지
정득용 작가 개인전…갤리리 팔조 내달 9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3.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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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 창작물·기성품에
작가 예술적 감수성 가미
또 다른 미술 가능성 제안
기존 형태 다듬어 새 세계 선사
로마 조각·이케아 용기 등 차용
이번 설치작업은 ‘간접적 활용’
도시락·반찬그릇 틀 따내 조각
20여년째 이탈리아 거주·작업
동·서양 조화에 과거·현재 공존
정득용작가의개인전
정득용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팔조 전시장 전경.

인류의 역사는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명제를 증명해온 시간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역사 이래 축적해 놓은 유무형의 자원에 아주 작은 창조적 발견이나 발명을 부가하며 한 걸음씩 진화해왔다.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의 기초가 ‘축적된 자원’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정득용 작가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인류가 진화해온 궤적 위에 있다. 그는 자신을 창작의 유일한 주체로 인식하기보다 제3자의 창작물이나 작업 방식에 자신의 예술적인 감수성을 덧대는 방식으로 또 다른 미술적인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을 자신의 미술적인 태도로 삼아왔다.

기성품이나 장인들의 숙련된 작업 방식을 작업의 출발에 두려는 태도는 그를 둘러싼 환경과 무관치 않다. 성장기에는 대학에서 조각을 가르치며 조각 작업을 병행하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이탈리아 유학 이후에는 고대 로마 제국과 르네상스의 화려했던 유산을 무시로 보며 살았다. 그런 환경들은 그로 하여금 기성품과 장인들의 기술을 존중하고 인정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탈리아 벼룩시장에 가면 고대 로마풍의 조각들을 손쉽게 구입하고, 판화 장인들의 숙련된 기술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축적된 예술적 자원들에 저의 미술적 행위를 결합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어요.”

이미 존재하는 건물을 허물고 신축하는 것보다 증축이나 수리가 더 까다로운 법이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에 기존의 공간이 주는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기성품을 작업의 재료로 가져 오겠다”는 발상이 가성비로 따졌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지만, 웬만한 내공이 없고서는 원만한 성취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기성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제3의 창작자의 기운과 재창작자인 자신의 미학적인 신념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라야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획득할 수 있지만, 현실은 충돌이나 갈등관계에 놓일 확률이 높다.

최근 개막한 그의 갤러리 팔조 개인전 제목 ‘만나다(Contatto)’에 그의 예술세계가 압축되어 있다. 설치, 조각, 평면 등으로 다채롭게 펼쳐놓은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만남’에 주목하고, 전시 제목으로 정했다. 그에게 만남은 곧 접촉이다. ‘접촉’은 세상에 널려있는 기성품들 중에서 작업의 소재로 선택하는 그의 기준점이자 예술의 출발선이다. “저와 정신적으로 교감한 조각이나 기성품을 작업의 재료로 선택하는데, 그 선택 기준이 ‘만남’이죠.”

정득용은 서울시립대 환경조각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작업 초기에는 아르테 포베라의 영향을 받아 버려진 오브제, 기성품인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작업을 했다. 버려진 의자를 자유롭게 조합해 추상적인 형태를 만들기도 했고, 유럽에 버려진 철강 오브제를 가지고 사포로 갈아 사무라이 칼처럼 번쩍이게 제련하는 작업도 했다.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진행된 출발은 조각이었다. 벼룩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석고상 중에서 마음에 드는(접촉) 인체 브론즈 조각이나 석고상을 구입하고 그것들의 두상 일부를 샌딩 머신으로 갈아내어 평평하게 다듬었다. 깎아내서 획득한 평평한 면은 원래 있던 입체적인 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감으로 드러났다. 석고상의 기존의 형태와 다듬어서 사라진 기하학적 면의 조화는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기성품에 그의 미학적인 태도가 더해져 새로운 예술세계의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이었다.

작가는 이런 방식에 대해 “조각보다 샌딩 머신으로 이미지를 지우는 순간에 대해 기록한 결과물”이라고 언급했다. “얼굴의 일부를 평평하게 갈아냄으로써 시각적으로 새로운 형상으로 이끌었으며, 개념적으로는 생각하는 주체를 갈아버림으로써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었죠.”

브론즈 조각이나 석고상이 기성품에 대한 직접적인 활용이라면, 이번 전시에서 커튼처럼 구현한 설치작업은 간접적 활용의 대표적인 예다. 베니스에서 활동하던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명화 속 오브제인 교황의 모자나 물주전자 등의 이미지를 캡쳐 해 투명한 천에 판화기법으로 표현하고 설치한 작품이다. “로마의 신화라는 과거의 이야기와 저의 감수성이 결합한 것을 이탈리아 판화 장인의 기법으로 도출해 냈어요.”

이번 전시에 선보인 평면 작업은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이다. 스웨덴의 가구 및 생활 소품을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인 ‘이케아(IKEA)’의 생활용품인 둥근모양이나 사각 모양의 컵이나 도시락을 등 빈용기의 형태를 시멘트로 캐스팅한 후에 평면에 그 형태를 그리고 색을 입혀 판화기법으로 제작하고, 각각 제작된 3~4개의 평면을 또 다른 평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겹으로 구축한 작품이다. “그림 속 이미지들은 모두 저의 마음과 접촉된 이미지죠.”

그가 언급하는 ‘만남’이 곧 ‘감응’을 말한다는 것은 쉽게 증명된다. 마음으로부터 울림이 있는 대상들이 채택되는 까닭이다. 석고상이나 인체 브론즈의 일부를 깎아서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들은 어린 시절 형들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자전거의 녹을 닦아서 제거하던 기억으로부터 왔다. 특정한 대상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투영하면서 특별한 감응으로 연결된 사례다.

“석고상이나 브론즈의 입체 부분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자전거의 녹을 제거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얼굴의 일부를 깎아내면 자전거의 녹슨 부분이 제거 되듯이 본래의 물성인 브론즈나 석고를 드러낼 수 있겠다 싶었죠.”

이케아의 둥글거나 네모난 플라스틱 용기에서 받은 감응 또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 주던 도시락에 대한 기억과 결부됐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도시락통에 시멘트를 붓고 틀을 따내는 조각 형식으로 구현하다, 이번 전시에 형태들을 겹치는 평면으로 제작했다.

“어머니가 싸 주시던 둥근 도시락 속에는 밥그릇과 반찬그릇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형태였어요. 이케아에서 그 비슷한 형태를 보자 기억 속 도시락을 떠올렸죠.”

그는 20여년째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비주류, 이방인이라는 그가 처한 위치는 일상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그의 삶이 의식하지 않아도 서양과 다른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이 명확하게 보이는 구조라는 의미다. 이는 작업에 동양적인 정신들이 태생적으로 침투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신의 작업에 “‘동서양의 공존’이라는 화두가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제 작업이 과거와 현재, 물성과 정신의 공존으로 점철되지만 동양과 서양의 융합이라는 개념도 빠트릴 수 없어요.”

동양적인 사상은 명화 속 은쟁반, 물주전자, 교황의 모자 등에 투영된다. 모두 쓰임을 위해 비어있는 공간을 확보한 사물들이고, 그는 그런 텅 빈 공간감에서 노자의 도(道) 사상을 발견했다. 노자는 텅 빈 상태인 무(無)에서 쓰임인 유(有)가 나온다고 설파했다. 바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논리였다. 정 작가는 노자의 사상을 수용하며 ‘빈 공간을 가진 사물’들과 정신적으로 접촉하고, 그 형상들을 설치나 평면 등에 구현했다.

이케아의 용기들을 통해 자신의 과거 기억을 소환하고 이탈리아 장인들의 인체 브론즈나 석고상이나 티치아노의 명화에서 과거 이탈리아 예술의 역사를 떠올리고, 그 기억들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정득용. 이케아나 명화 속 용기나 이탈리아 장인들의 조각품들은 이미 디자인에서 검증받은 대상들이다. 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용기는 형태나 색상에서 도드라지기보다 가장 본질적인 디자인에 집중한 기물들이다. 그 역시 자신의 화면에 본질 중심의 태도를 녹여낸다.

본질을 향한 집념은 작품들에서 미세한 차이만 허용하도록 이끌었다. 색채의 경우 한 화면에 두 세 개로 제한하고, 그것도 원색만 사용한다. 색을 섞을 경우 정말 다양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어 그 점을 경계한 선택이다. 과격한 운동성보다 고요한 명상에 비유될 수 있는 구현방식이며, 본질이 이끈 경지다.

그가 “저의 경우 미묘하게 다른 차이에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고백했다. “저의 예술은 단순 명료한 행위를 통해 창작이 무한 증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양의 조화 못지않게 그가 천착하는 화두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그에 의해 축적되는 시간성에 대한 언급인데, 이 개념 역시 그와 제3자의 협공으로 전개된다. 그의 기억과 누군가가 만든 기성품은 과거 시점이 되고, 그것에 부가되는 그의 예술적인 행위는 현재 시점이 된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인위(人爲)과 무위(無爲)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관심사를 펼쳐내는 그의 전시는 4월 9일까지 갤러리 팔조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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