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비파의 장인들 ‘한반도의 배꼽’ 달구벌로 몰려들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비파의 장인들 ‘한반도의 배꼽’ 달구벌로 몰려들어
  • 김종현
  • 승인 2023.03.2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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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자연 금호가 거문고와 가얏고를 탄생시키다
200년경 거문고 제작·연주 명인 많아
거문고 명인 전문가를 ‘극종’이라고 해
달구벌 달성 초대성주에 거문고 명인
민심 조율해 ‘전쟁’ 불상사 없앨 속셈
금호거문고가얏고
그림 이대영

◇신라삼현(新羅三絃)에 제일은 거문고, 다음이 가얏고

삼국사기 악지(樂誌)에 “신라 궁중음악은 3현(三絃과 3관(三管)을 기반으로 박판, 큰북, 가무로 구성된다. 춤은 두 사람이 춘다. 악공들은 뿔난 모자를 쓰고, 자주색 큰 소매 옷을 입으며, 붉은 황금이 입힌 허리띠를 차고, 새까만 가죽신을 신었다.” 한 마디로 다채로운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현악기 3종 첫째 거문고(玄琴), 둘째 가얏고(伽倻琴)이며, 마지막은 비파(琵琶)였다. 거문고는 중국 칠현금을 모방해 만들었다고 하나, 동한의 채옹(蔡邕, 132 혹은 133~192)이 저술한 ‘금조(琴操)’에 의하면 동이족이었던 삼황오제 가운데 복희씨가 금이라는 현악기를 만들었다. ‘사악함을 물리치고, 음탕한 마음을 막아낸다. 즉 수신과 수양을 통해서 이성을 찾고,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도록 하고자 함’이 악기를 만든 취지였다. 천지조화의 이치와 우주생성의 비밀을 녹아내어 거문고를 제작하였다. 즉 이런 이치를 담고자 “길이를 3자 6치 6푼으로 366일을 뜻하고, 넓이가 6치인 게 육합(六合:天地東西南北)이며, 오동나무 판 위에 움푹 파인 연못(池) 모양은 물처럼 공평함을 의미한다.”

또한 “울림 밑 판자(共鳴桶)를 빈(濱)이라고 하는 데 섭리의 순행을 축도(祝禱)했다. 앞머리가 넓고 뒤쪽이 좁은 건(前廣後狹) 세상에 존비(尊卑)가 상존함을, 위가 궁글고 아래에 모난 건(上圓下方) 당시 우주관이었던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남(天圓地方)을 본떴다. 5줄은 오행(五行)이며, 큰 줄은 군왕, 나머지는 신하, 백성 등을 의미했다.” 칠현금이 7줄인 건 칠성(七星, 북두칠성)을 본뜬 것이다. 후한의 응소(140~206)가 지은 ‘풍속통의’에서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칠현금은 처음 동진(東晉, 316~419)에서 고구려에 보냈는데 음률과도 맞지 않았고, 연주법도 몰랐다. 이를 왕산악(王山岳, 高句麗 第二相)이 고유음색과 음률을 개량해 100여 곡을 작곡하고 보니,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출 정도라서 ‘검은학 고(玄鶴琴)’혹은 줄여 ‘거문고(玄琴)’라고 했다. 이는 곧 신라에 전파되었다.

진시황제의 나라 진(秦, BC 900~BC 206)이 망하고, 전한(前漢, BC 202~AD 8)도 망했으며, 또한 신 나라(新 AD 9~AD 23)까지 망하자, 망국의 유랑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전한(前漢)에서 고구려에 가장 먼저 도입되었다. 전한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226~261)에서 비파의 장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농경의 풍요를 상징하던 ‘별나라 별동네(辰國辰韓)’였던,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하는 달구벌로 몰려들었다. 달구벌에서는 200년경에 이미 거문고 제작은 물론 연주하는 명인들이 많았다. 거문고 명인에 도달했던 전문가(宗家)를 극종(克宗, Master of Geomungo)이라 했다. 첨해왕15(261)년 2월에는 달구벌 달성성주에 나마극종이란 거문고의 명인이 임명했다. 그들이 전한에서 바로 달구벌에 유입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름으로는 극종은 ‘거문고 달인’이다.

고고학적으로 357년 축조된 안악(安岳) 제3호 고분벽화와 집안(集安)현 무용총 벽화에서도 거문고 연주 그림이 발굴되었다. 삼국사기에 거문고 명인으로 극종이란 명칭이 재등장한 때는 혜공왕(재위 742~765) 때다. 거문고 명인 ‘귀금(貴金)’으로부터 비곡, 표풍 등 3곡을 안장(安長)이 이어받았다. 그는 곧 둘째 아들 극종에게 그대로 전수했다. 극종은 새로운 거문고 7곡을 지었다. “이후에 거문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고, 업종으로 극종이 생겨났다(克宗以後, 以琴自業者非一二)”고 삼국사기에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1075~1151)은 거문고 명인의 직종명인 극종을 일반이름 속에 감추었다. 당시는 예술직종의 신분을 천시했다.

사실 경덕왕(재위 739년~742년월) 때 육두품에 속했던 사찬(沙飡)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 생몰연도미상)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간 거문고에 빠졌다. 그는 30곡의 거문고 곡조를 지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했다. 애장왕(재위 800~808) 당시에 거문고 명인을 많이 활용했다. 금도(琴道)는 이어져 속명득에서 귀금으로 이어졌다. 귀금선생은 헌강왕(재위 857~861) 때에 활약하다가 지리산으로 숨었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경문왕(재위 861~875)은 ‘금도’가 없어질까 염려하였다. 그는 이찬 윤흥(출생미상~866)을 남원경 사신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금도를 배워오게 했다. 그는 총명한 소년 두 명(安長·淸長)을 선발해 지리산에 은둔 중인 귀금 선생에게 배움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미묘한 비법만은 3년이 지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윤흥이 극진한 예의를 갖춰 대우해드리니, 귀금 선생은 표풍 등 비곡 3곡까지 전수했다. 수제자였던 안장은 자신의 둘째 아들 극종에게 전수했다. 극종 이후에는 거문고 관련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극종은 거문고 명인(玄琴名人)이라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작곡한 거문고 곡명이 187곡이나 되었다.

◇우륵(于勒)과 신립(申砬)의 탄금대(彈琴臺) 심산대결(心算對決)

신라 첨해왕이 달구벌 달성 초대성주에 거문고 명인 극종을 임명한 이유는 탄금명인이 평시에 민심을 조율해 전쟁이란 불상사를 없애겠다는 속셈이었다. 그가 성주로 있었던 때 어떤 불상사도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와 제갈공명이 탄금으로 이심전심했던 사례가 있었다. 제갈공명은 아예 성문을 다 열어놓고 성루에서 탄금공성계(彈琴空城計)를 써서 사마중달을 30 리나 물러나게 했다. 오늘날 용어로 심리작전이다. 거문고나 가얏고의 명인들은 연주할 때는 줄을 당겨 매지만 연주를 하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는다. 이를 긴장과 이완이라고 한다.

긴장의 정도를 오늘날 조률(調律)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얏고 혹은 거문고 명인의 조현기법을 전쟁에 이용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 문화용어로는 군사력으로 뭉개버리는 것(hard power)보다도 부드러운 ‘소프트파워(soft power)’로 물처럼 스며들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우륵 선생이 가얏고를 연주했던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은 긴장만을 알았지 이완을 몰랐다. 신립은 몰살당했고, 자신도 자결했다.

신라고기에 기록된 가얏고에 대해 살펴보면, “가앗고는 가야국 제7대 가실왕(재위 421~451)이 당나라 악기(혹은 南齊之箏)를 보고 만든 것인데,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으랴?”라고 했다. 그리고 “악사인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창작하게 하였다. 그 후 국란이 이어지자 우륵이 악기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을 데리고, 신라 진흥왕12(551)년에 귀순했다. 진흥왕(재위 540~576)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성(忠州)에 안착시켰다. 다음 해 552년 대나마, 주지, 계고와 대사 만덕 등을 보내 그들에게 배움을 받도록 했다.

왕명을 받은 세 사람은 우륵으로부터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라 하였다.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화를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의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爾其奏之王前).’라고 말했다. 진흥왕이 그들의 연주곡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간신배 관료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상신했다. 국왕이 그 말을 듣고 ‘가야 국왕이 음탕하고 난잡해서 자멸한 게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을 내렸다.”

가얏고에는 두 종류의 곡조(曲調)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이고,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인데 이들 모두가 185곡이나 됐다. ‘삼국사기절요’에서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기,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한째는 이사, 열두째는 상기물이었다. 우륵의 제자 이문(泥文)이 지은 3곡은 첫째는 까마귀, 둘째는 쥐, 셋째는 메추라기였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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