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천기와 행보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천기와 행보
  • 승인 2023.05.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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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12월20일, 향년 38세로 정암 조광조는 그간 매일 찾아온 학포 양팽손(梁彭孫,1488∼1545)에게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憂國如憂家) 세상 굽어보는 저 해 아래(白日臨下土) 충정을 밝게 비추리(昭昭照丹衷)라는 유시(遺詩)를 건넸다. 삼봉 정도전, 잠육 김육(경진년 갑신월 신사일생)과 더불어 개혁정치가였던 조광조는 34세에 벼슬길에 나서 겨우 5년 만에 대사헌에서 올라 급진개혁을 추진하다가 1519년 기묘사화로 전라도 능주(화순)로 귀양간 지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말았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이후 선조대에 증영의정과 문정공의 시호를 받는다. 또한 1610년(광해군2)에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오현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다. 정암선생은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1일에 한양 조씨 조원강과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수를 시조로 하는 한양조씨(漢陽趙氏)는 1258년(고종 45년) 조지수의 아들 조휘(趙暉)가 군사를 일으켜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투항한 그 공으로 초대 쌍성총관이 되어 4대로 세습했다. 이후 조돈(趙暾,1307~1380)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시 고려에 귀부한다. 조돈의 아들 조인벽과 조인옥(趙仁沃, 1347~1396)은 조선개국공신이다. 조인벽의 장남이 개국 2등공신이자 정암의 고조부인 양절공 조온(趙溫, 1347년 ~ 1417년)이다. 조온의 계모는 이성계의 동복누나인 정화공주이다. 정암의 증조부는 조온의 5남 조육, 조부는 조충손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이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한양조씨 문중선산에는 7세 조육부터 8세 조충손, 9세 조원강,10세 조영조 조광조, 11세 조용(趙容)의 부부묘가 있다.

조광조의 사주는 ②병화(丙火)일간인 태양이 바다나 호수 및 강을 상징하는 ⑤임수(壬水) 편관을 비추는 수보양광((水補陽光))구조이다. 병임(丙壬)구조는 일조호해(日照湖海)와 보영광휘(輔映光輝)라 태양인 ②병화(丙火)일간이 자기의 활동무대와 권력의 무대인 ⑤임수(壬水)를 만난 모습으로 사회적인 활동이 권위가 있고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다. 다만 ⑥기토(己土)상관의 개혁과 시시비비의 저항의식이 기토탁임(己土濁壬)으로 인하여 미완의 개혁으로 마무리된 점은 조광조사주의 아쉬움이다,

그의 개혁이 좌초된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의 기토는 더욱 더 기토탁임을 강화시킨 해로 상관운이자 묘유충(卯酉沖)과 자묘형(子卯刑)이 발생한 해였다, 이 사주에서 좋은 점은 초년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자는 생년의 ④인목(寅木)편인의 오행이자 십성(十星)이다. 병화의 인목은 생기를 가진 장생이자. 에너지원이다, 인목(寅木, 범)이 기획, 빌딩, 관청, 공문(公門), 출판, 전기, 전자, 통신, 정보, 인터넷, 건축, 교통, 자동차, 운수, 항공, 터미널, 우체국, 신문사, 의류, 양육, 유아교육, 공부방, 유치원, 학원, 아동복, 의류매장, 방송, 영상, 여행사. 극장, 학교, 교육, 화랑, 서점, 산림, 목재소, 전자제품, 악기점, 안테나, 중풍, 머리질환을 상징한다.

④인목(寅木)편인(偏印)은 조상이나 어머니와 스승을 말하고 학문적인 바탕을 말한다. 조광조의 어머니 민씨는 아들에게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 김전과 같은 주동자이자 김종직의 문인인 남곤(1471~1527)을 멀리하라고 충고했고, 아들이 남곤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도 이사하였다 한다.

조광조의 학문적인 연원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계승된 사림파의 학통을 이어ㅤㅂㅣㄷ고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1452~1512)의 학문적인 영향을 성균관에서 수학중 받았다. 정암은 17세때 어천찰방이던 아버지의 임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김식,김정, 기준, 김구(金絿)등의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향약(鄕約)실시와 소격서 혁파를 강행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와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사건으로 조광조와 기묘명현 및 안당과 김안국·김정국 형제 등도 홍경주, 심정, 남곤, 김전등의 훈구파와 중종에 의해 정계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그의 천운은 계축대운의 정관(正官)과 상관(傷官)이 공존하는 운에 기묘년(己卯年)의 상관년(傷官年)이었다, 율곡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조광조의 학문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개혁의 실패로 제시하고 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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