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 쓸쓸하고 듬직한, 슬픈 아일랜드
[백정우의 줌 인 아웃] 쓸쓸하고 듬직한, 슬픈 아일랜드
  • 백정우
  • 승인 2023.05.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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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 내용은 단순하다. 둘도 없는 단짝 콜름과 파우릭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콜름은 그냥 파우릭이 싫어졌다. 우정을 배신당했다고 여긴 남자는 이유가 궁금하다. 싫다는데도 계속 쫓아다니며 회복을 간구한다. 이유? 그런 거 없다. 좋은데 이유 없듯이 싫은데 이유가 있을라고. 말 섞는 것조차 싫으니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라는 콜름이다. 집요한 파우릭의 접근은 콜름의 극단적 행위를 불러일으킨다. 내게 말을 걸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네 집 문 앞에 던지겠다는 것. 농담이 아니었다. 처음엔 한 개를 잘라 던지더니 그래도 말이 안 통하자 파우릭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당나귀를 죽이고 나머지 손가락 네 개마저 던진다. 그제야 포기한 파우릭은 복수를 다짐하고 콜름의 집을 불태운다. 물론 콜름도 그의 개도 무사하다.

건조하고 무료하고 비관적인 섬사람들의 일이라곤 가축을 먹이거나, 펍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구슬픈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게 전부다. 영화 내내 햇볕 한 번 비추지 않는 우울한 땅에서 오랜 친구가 갑자기 등을 돌렸으니 파우릭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반면 콜름의 생각은 다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술이나 마시면서 노닥거릴 시간에 좋은 곡을 더 만들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우리는 영화의 배경이 1923년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러니까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함께 한 형제의 운명이 엇갈리던 그때,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된 직후, 마틴 맥도나의 두 남자는 아일랜드의 외딴 섬 이니셰린에서 우정과 외면에 관해 필사적으로 다투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영화에 몇 차례 들려오는 포격소리와 총소리는 본토의 혼란스럽고 엄중한 상황을 알려준다. 감독은 두 남자의 우정의 균열이라는 일상적 사건 속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책무를 슬그머니 끼워 넣는다. 즉 시대의 균열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 미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섬에 갇힌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똑같은 일상으론 안 된다는 단순한 진리. 가장 가깝고 아끼는 대상을 버림으로써 가능한 변화는 콜름이 파우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프닝과 동시에 등장하는 파우릭의 여유만만하고 편안한 표정은 콜름에게 거절당함과 동시에 사라지더니 이후로 영영 회복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바닷가에 선 콜름과 다른 편으로 걸어가는 파우릭. 받아들여지길 원하지만 거부당한 파우릭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돌처럼 굳건히 자기 생각을 굳힌 콜름의 어깨가 듬직하다. 두 남자가 곧 이니셰린이고 슬픈 아일랜드이다.

(추신)

1. 콜룸과 파우릭을 연기하는 브랜단 글리슨과 콜린 파렐은 ‘킬러들의 도시’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선배 킬러 역의 브랜단은 콜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력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치고 배신해도 된다는 얘기다. 물론 농담이다.

2. 살면서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원빈의 옆집 여자아이, 둘째 리암 니슨의 딸내미. 그리고 존 윅의 강아지다. 파우릭이 콜름의 개를 살려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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