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일본으로 간 신라사람들이 신천 江名을 성씨로 삼아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일본으로 간 신라사람들이 신천 江名을 성씨로 삼아
  • 김종현
  • 승인 2023.05.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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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천, 사잇개울(샛강, 샛걸)
일본 성씨어원 사전에 ‘신천’ 언급
‘고국 하천 명칭 신천, 성명에 사용’
조선왕조실록 기록 살펴보면
‘하천 원류 막고자 농경지에 수로 조성
200여 가구 백성들이 원망·한탄했다’
금호강신천간천
금호강 신천·간천.

◇판관 이서 제방 쌓아 공덕비(功德碑)

고서지(古書誌)를 통해 대구 신천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천은 대구부에서 동쪽으로 4리에 있으며, 팔조령에서 흘러 내려 금호강으로 유입된다”고 적혀 있다.

1757년에서 1765년경에 출판된 여지도서(輿地圖書), 1767년과 1770년 사이에 출판된 대구읍지(大丘邑誌), 1861년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와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서도 “신천은 대구부에서 동쪽 4리에 있고, 한쪽 원류는 팔조령(八助嶺)에서, 다른 한 곳은 최정산에서 흘러내려 사방산 앞에서 합류해 (대구도호)부의 북쪽 금호강에 흘러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지지(大東地誌)에서는 “비슬산과 팔조령을 원류(源出毗瑟山及八助嶺)”로 적었다.

1908년 대구읍지(大丘邑志)에서는 “신천은 동쪽 5리에 있으며, 그 원류는 남쪽 협곡에서 내려와서 수성들과 달구벌을 거쳐 북으로 흘러 금호에 유입되는데, 도호부의 서쪽엔 매년 물이 범람하는 수해가 생겨서 이서 판관이 둑을 쌓았다. 신천 원류는 우록(友鹿)의 좁은 골짜기를 흘러내려 한천(寒泉, 冷泉)과 매계(梅溪, 亭垈)를 흐르면서 명승지를 만들고 있다”고 기록했다.

한편 이서 판관이 1778(영조2)년에 신천에 쌓았던 방제(防堤)와 천변에 심었던 방제림(川邊林藪)에 대해 대구부읍지(大邱附邑誌, 1899)에는 “동쪽 5리 하수서면과 동상면에 신천둑 길이가 10여 리나 되는데, 영조 2년 즉 무술(戊戌, 1778)년에 판관 이서가 읍내기반에 수해방지를 위해 제방을 쌓았고 숲을 조성했다. 고종 무진년(戊辰, 1868)에 읍내 사람(邑人)들이 공덕비(功德碑)를 세웠고, (중국 항주에 소동파의 공덕비 소공제를 벤치마킹해) 이공제(李公堤)라고 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대구읍지(1908)에서는 “대구도호부의 남쪽 10리에 신천 방천둑(新川堰)이 있는데, 정조 무술년 향교 터와 읍내기반에 물이 범람하는 재앙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판관은 신천 일대 방천을 높이 2척 정도, 대략 10리가량 높였다. 또한 제방 위에 언홍정(堰虹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신축년(1781)에 바람을 만나 정자는 쓰러져 버렸다. 무진년(1808)에 읍내 사람들은 판관의 공적에 대한 비석을 세웠고 이를 이공제비(李公堤碑)라고 불렸다.” 고 했다.

◇신라시대부터 신천?

신라 시대부터 신천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 성씨어원 사전(日本姓氏語源辭典)’에서 “신천(新川, シンカワ)이라는 일본인 성씨의 기원에서 (신라에서 온 사람들이) 신라(新羅)라는 국명의 신자(新字)를 따왔거나 혹은 고국의 하천명칭였던 ‘신천(新川)’을 성명(姓名)에다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신라시대 이미 신천이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신라사람들이 신천 강명을 자기들의 성씨로 삼았다.

다시 조선시대로 시각을 돌리면, 1778년 이전에 발행되었던 즉 1425년 간행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531년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大丘)편에는 이미 신천(新川)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최신 기록에 해당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의 동쪽 4리에 신천이 있는데 팔조령에서 흘러내려 금호로 유입된다(新川在府東四里出八助嶺入琴湖)”라고 적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살펴보면, 1481(성종12)년 정유년 1월 22일자 “대구부사 최호원(崔灝元)이 풍수지리를 믿고 하천 원류를 막고자 백성들의 농경지에다가 수로를 만들어 그곳으로 물이 흐르게 해 200여 가구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한탄했다. 이명숭(李命崇) 암행어사는 이런 사실을 국왕에게 보내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국왕 성종(成宗)은 최호원의 풍수지리를 놓고 경연(經筵)을 개최해서 갑론을박을 거친 다음 결론을 내렸다. 최호원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한 확신은 “(산수음양론에서) 남쪽에 산이 양이(陽)고, 북쪽 물길이 양(陽)에 해당한다.”라기에 음양조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면, 1481(성종12)년 1월 23일자 기록에서는 “최호원(崔灝元)을 호출하라는 명령(命召)을 내리고, 전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지리의 학설은 허탄하고, 망령돼 믿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대도 유자(儒者)이니, 모두 말해 보아라.’는 국왕의 물음에 최호원이 대답하기를 ‘지리의 학설을 허탄하고 망령된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 말과 행동이 어긋납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그 음양(陰陽)의 산세(山勢)를 보며, 동시에 그 유천(流泉)을 관찰해야 합니다.’고 대답했다(必觀風水, 以此而可知矣.言甚不經, 人皆鄙之)”고 적었다.

같은 해(1481년, 성종12년) 2월 2일자에도 “시경에 이르기를 음양을 살피며 그 유천을 본다 하였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산 남쪽을 양(陽)이라 하고, 산 북쪽을 음(陰)이라 하며, 유천은 샘물로 관개하는 이(利)를 말합니다. 최호원이 이 두 구절에만 마음이 꽂혀서 풍수지리설을 입증하려고 했으니, 이는 성경(聖經)·현전(賢傳)을 끌어 묵적(墨翟)에게 들어가는 꼴입니다. 성상(聖上)께서 경전(經傳)에 널리 정통하셨으니, 최호원의 말에 뭔가 꾀임이 있다는 사실을 훤히 들여다보실 것입니다(聖上, 博通經傳, 洞然知灝元之言, 爲誣也)” 라고 국왕과 경연의 결론을 적었다.

◇동서양에 있는 신천

신천이란 용어는 동서양에 공동으로 존재한다. 미국에도 515㎞의 뉴강(New River)이 있고, 일본에서도 신천(新川, しんかわ)이란 지명은 100여 곳을 넘게 사용하고 있다. 지명뿐만 아니라 회사명, 인명은 물론이고 성씨까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황해도 신천, 서울시 오늘날 신천 일명 송파강이라고도 하며, 경기도에서는 시흥시, 가평군 및 양주시에서 신천이 하나씩 다 있다. 물론 대구에도 신천이 있다.

대부분의 신천은 ‘새롭게 형성된 실개울(新生絲溪)’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기존 물길 사이에 새로운 물길이라는 사잇 물길(中澗) 혹은 샛강(間川)의 뜻까지 같이 지닌다. 대립적 지형지물(산, 물길, 경작지, 경계선 등)과 행정구역(시·도·국 경계선)의 가운데(틈새)를 따고 들어온 물길이라는 간천(間川) 혹은 샛강(間溪)이라는 개념도 된다.

따라서 신라시대(新羅時代) 대구현은 수창군(壽昌郡)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가, 대구군(大丘郡)에 수창(성)현이 영속되는 행정구역 개편 역사가 있었다. 즉 행정구역 변천에서 대립적인 개념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잇개울(샛강, 샛걸) 혹은 간천(間川)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성도 당위성도 있지 않았다. 만약 같은 시기에 대구군과 수창(성)군으로 행정구역이 대립했다면 반드시 ‘사잇개울(間川)’,‘사잇천(間溪)’,‘새천(中川)’등으로 호칭되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즉 757(경덕왕16)년 달구벌현(達句伐縣)을 대구현(大丘縣)이라고 한자명으로 개편함에 따라 ‘사잇걸(間川)’을 ‘신천(新川)’으로 고쳤을 경우도 있다. 유사한 사례로는 오늘날 문경 새재(間嶺)는 이화령(梨花嶺, 배꽃재)과 하늘재(天嶺) 사이에 있던 ‘사잇고개(間嶺, 새재)’를 한자로 “조령(鳥嶺, 새재)”으로 부른 것이다.

심지어 1946년에 상영된 미국영화 ‘정부(情夫, postman)는 항상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가 우리나라에서는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당연히 당시 체신청과 전국체신노조(우편배달부)의 항의가 빗발처럼 몰아쳐 영화 수입사가 ‘포스트맨은 두 번 벨을 올린다’로 제목을 수정해 상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여기서도 정부(情夫, postman)에 해당하는 샛사내(間夫), 샛서방(曰者, 왈짜) 혹은 기둥서방(postman)을 조선시대부터 ‘신랑(新郞)’이라는 순화용어로 사용했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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