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정조의 천기와 인생괘적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정조의 천기와 인생괘적
  • 승인 2024.04.1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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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원장
18세기 조부 영조와 더불어 18세기 문예부흥을 불려왔던 정조는 영월의 정조 태실의 아기비(阿只碑)에 의하면 1752년(영조 28년)9월22일 축시경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사적 제200호 서삼릉 경내의 의령원(懿寧園)에 안장된 형 의소세손(1750 ∼1752)이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 이후 1759년(영조 35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조부 영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후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진종, 1719∼1728)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23살에 정식으로 이었다. 1776년 1월 30일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3개월 뒤 조부 영조가 8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이 사주는 한로와 상강이 포함된 ①술토(戌土) 겁재(劫財)월의 인간이 경작한 대지인 논밭이나 과수원과 같은 ②기토(己土)일간이다. 기토(己土)는 낮고 축축한 습한 기운의 속흙으로, 갑목(甲木), 정화(丁火), 신금(辛金), 임수(壬水)와 더불어 음권(陰圈)의 중심으로 인간이 개발하고 개척한 땅이다. 또한 기토는 전원토, 논, 밭 등의 흙이며 지지의 축(丑, 소), 미(未, 양)와 같은 뜻이다.

사주를 간명시 주목하는 궁위(宮位)는 ①월지(月支)이다. 그러므로 정조의 부모형제궁이자 사회궁에 해당하는 월지의 ①술토(戌土) 겁재(劫財)의 해석은 중요하다. 술토는 절기의 의미와 술토 자체의 물상의 의미와 술토에 해당하는 십성(十星)의 의미와 술토의 지장간 ㉠신정무(辛丁戊)의 해석이 모두 필요하고 ,월 지장간에서 투출한 격국(格局)의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①술토(戌土)는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시기이자 날짜는 양력으로 10월 8일경인 찬이슬이 맺힌다는 시기인 한로(寒露)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을 포함하는 음력9월의 기상을 말한다. 술토는 가을을 상징하는 신유술(申酉戌) 서방금방국(西方金方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또한 인목(寅木,범)과 오화(午火, 말)와 합하여 인오술(寅午戌)의 삼합(三合)이 되어 태양의 빛인 병화(丙火)와 생활터전인 무토(戊土)의 묘고(墓庫)가 되어 여름의 불씨를 저장하고 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즉 화로에 불씨인 정화(丁火)를 묻어둔 상태의 화로이다. 한편 술토는 묘목(卯목,토끼)과 묘술합(卯戌合)하는 육합(六合)의 관계이다. 정조의 사주가 부모형제궁과 배우자궁이 육합으로 배우자와 부모형제궁이 친근함을 나타낸다. 술토는 축토와는 축술형(丑戌刑)의 관계이다.

술토의 물상은 하늘에서는 노을이 되고, 땅에서는 높은 언덕이나 성벽, 무덤이 된다, 또한 술토는 변화가,시장통, 군대, 무장, 탄창, 폭탄, 동굴, 영화관, 도서관, 편집부, 문자, 강단, 교육, 골동품, 금고, 관사, 유흥장소, 술집, 수도자 등을 나타낸다. 정조는 서도세자의 산소인 양주의 영우원을 1789년 기유년(己酉年)에 화평옹주의 배우자인 금성위 박명원(1725∼1790)의 건의를 받아들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인 화성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육순이 되는 1794년(정조18년) 갑인년(甲寅年) 수원 화성축조의 계획을 발표한다. 그전인 1791년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페지한 신해통공(辛亥通共)과 1793년 자기의 친위군대인 장용외영을 수원에 설치한 것은 수원경제와 군사적인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795년 을묘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성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은『반계수록』의 유형원이 제시한 내용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1796년 병진년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3월, 호학(好學)의 군주답게 고금의 서적을 수집하고 제왕들의 어제와 어필을 봉안하는 도서관과 인재양성기관이자 학술정보를 수집하고 정책연구기관으로 세종의 집현전을 계승한 규장각 설치를 명했다. 1781년 세도가 홍국영이 제거된 이후부터는 정조대 남인과 소론의 채제공, 이복원, 이성원, 서명응 등과 노론 시파등 총 38명의 각신(제학, 부제학, 직각,대교)과 류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의 검서관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연소 문신의 규장각의 재교육과 신진 정치세력양성목적으로 정약용, 서유구,류태좌, 한치응, 홍의호등 남인과 북인계열을 포함한 등 총 138명을 선발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했다. 정조는 홍재라는 호를 1798년에는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로 사용하고 산림도통론을 부정하면서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제창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강력한 철인군주를 자처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정치는 무너지고 6년간 정순왕후의 노론 벽파가 집권하고 이후 60년간 외척세도정치의 시대가 오면서 조선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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