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소재 재해석한 작품 소개
이미지 비율 달리한 벽화 형태로
벽화 일부 캔버스에 옮겨 ‘스냅샷’
독일-서울서 디자이너·작가 병행
디자인이 다채로운 미학적 결실
미술 지평 확장하는 게 더 큰 과제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김영나 작가의 작업세계는 언뜻 보면 종잡을 수 없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스티커, 포장지, 포스트잇, 주차표지판에서 차용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 알파벳들에서 맥락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작업의 소재에 한계를 두지 않는 태도는 매체나 재료 선택에서도 겹쳐진다. 캔버스나 벽화, 텍스타일, 아크릴은 물론이고 석고까지 다채롭다 못해 변화무쌍하게 열어둔다.
작업의 소재와 재료가 다채롭지만 난맥상은 아니다. 다양함을 수렴하는 하나의 개념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픽디자인(graphic design·인쇄 기술의 특성을 이용하여 시각적 표현 효과를 창출하는 디자인). 그는 스티커나 표지판 같은 대량 생산되어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그래픽 디자인이나 자신이 참여했던 상업적인 디자인들을 미학적 관점으로 재해석해 미술 작품으로 승화한다.
그의 작업 과정은 “디자인의 수집과 창조적 편집”으로 정리된다. 편집은 현대인에게 익숙한 단어다. 서로 다른 분야들을 융·복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이나 정당성을 만들어 내는 일들이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인류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양과 질에서 수많은 문명들을 창조했고, 이제는 창조적 편집을 통해 세계의 확장을 모색하는 기류가 흐름을 만들고 있다.
편집이 시대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지만 유독 김영나의 편집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전통과 현대, 대륙과 대륙, 장르와 장르 넘나든다. 무엇이든 편집이 가능하고, 창조적으로 편집하면 미학적인 가치로 신분의 옷을 갈아입는다.
최근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만난 김영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칭했다. 장르와 장르, 매체와 매체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정의내림이었다. 특히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자신의 미술적인 위치에 대한 표현이었다.
디지인과 미술을 융·복합하는 배경에는 그의 남다른 이력이 자리한다. 그는 융합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와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2008년에 네덜란드 아른험 미술대학에서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작가와 디자이너를 병행한다. 베를린에 위치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LOOM을 운영하고도 있다.
디자인과 미술의 유기적인 결합이 김영나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이다. 그는 과거 코스(COS), 에르메스(Hermes) 같은 브랜드 또는 미술관 아트숍과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했고, 당시 사물과 재료가 의외의 상황에 놓였을 때 발생하는 색다른 이야기에 주목했다.
“익숙한 사물과 사건이 보유한 디자인적 요소를 새로운 시공간에 배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란 무엇일까?”라는 디자인적 관점에서 출발한 그의 주제의식은 현대미술과 전시장 속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그는 디자이너에게 ‘낯선’ 공간인 캔버스나 전시장 벽면과 디자이너에게 ‘익숙’한 인쇄물의 지면을 유기적인 관계 설정으로 융합했다. 디자인적 실천이 미술 제도에 개입하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디자이너와 미술 작가 사이 경계인으로 살고 싶은 김영나지만 디자인과 미술작업은 엄연히 다르다. 그에게 가장 큰 차이로 다가오는 것은 주체성이다. 디자인은 상업적인 요구에 부응해야 하지만 미술 작업은 작가의 주체성이 보장되고, 작업에서 작가의 능동적 개입이 허용된다. 특히 우연성의 미학도 한껏 끌어들일 수 있다.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작업은 13년 정도 됐다. 국내에서 전시 초대를 받았을 때, 전시공간에서 그의 디자인 작업들을 미학적으로 펼쳐놓은 것이 출발이었다. 당시 그는 “디자인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을 때 디자인의 맥락이 사라지고 다른 의미로 읽혀질지”에 의문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의문은 기우였다. 디자인이 미술, 건축, 공예 등 다양한 시각예술 장르 사이에서 층위를 더하자 애초의 디자인적인 맥락보다 훨씬 다채로운 미학적 결실로 연결됐다. 당시 그는 “디자인이 단순한 기능적 표현을 뛰어넘어 문화를 해석하는 기호로서 역할을 확대해 나가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런 주제의식 아래 그의 디자인들을 창조적으로 재편집한 설치 작업들을 선보였다. 특히 “디자인의 언어와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디자인이 새로운 언어 혹은 새로운 미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그를 미술계에 각인시킨 작업은 ‘세트(SET)’다. 개인 작업이나 주문받아 제작하는 커미션 프로젝트, 전시 출품작 등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한 작업을 모은 다음 기하학적 기준에 따라 작업을 분류하고 ‘세트’라는 일종의 샘플북을 만들었다. 디자이너로서 지난 여정의 총합이었고, 그래서 샘플북은 일종의 아카이브 북이었다. 그는 샘플북의 이미지를 다양한 공간의 벽에 옮기는 ‘세트’ 작업을 진행했다. 샘플북의 지면이 벽이라는 평면으로 옮겨지는 작업이며, 작품집은 곧 전시 매뉴얼이 됐다.
이번 국제갤러리 전시의 1섹션에 샘플북 속 디자인을 소재로 재해석한 작품 ‘SET v.25: View N’(2024)이 소개되고 있다. 기존 ‘세트‘ 작업에서 파생, 변형된 작품이자 그의 25번째 벽화다. 책 지면의 높이와 벽 높이를 기준 삼아 지면의 비율을 그대로 벽에 옮겨 재현했던 이전의 ’SET‘와 달리 이미지의 비율을 달리한 벽화의 형태를 띤다.
또 다른 전시작인 ‘조각 25-1’(2024)은 ‘세트’ 벽화의 일부를 다시 캔버스 위에 옮겨 그린 회화 작품이다. 벽화가 조각의 범주로 확장된 버전으로, 벽화 중에서 그가 기억하고 싶은 일부를 캔버스에 옮겼다. 벽화를 캔버스로 확장한 데는 “샘플북 속 디자인을 스냅샷처럼 올려보자”는 의도가 있었다.
“벽화에서 확장된 캔버스 작업이 제게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회화와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벽면에서 떼어 낸 조각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디자이너가 작업한 ‘세트’ 혹은 두께가 있는 포스터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죠.” 전시가 끝나고 벽화는 사라지지만 벽화의 일부를 표현한 캔버스 작업은 벽화 작업의 아카이브로 남고, 독자적인 작품으로도 기능한다.
두 번째 섹션에는 “수집한 스티커 등의 그래픽으로 디자인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출발한 작업들을 소개한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일상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그래픽 디자인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해 왔다. 스티커는 그 중 일부다. 그는 “스티커들을 모으는 데만 집착하지 말고 사용해서 없애거나 활용할 방법”으로 작업을 본격화했다.
작업은 스티커 원본을 10∼30배 정도 확대하고, 내용을 편집하고 아크릴, 석고, 섬유, 거울 등 다양한 재료와 접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미학적 의미를 찾아가는 통로가 됐다. 대표적인 작업이 ‘파이널 노티스’(Final Notice)다. 최후통첩을 뜻하는 차가운 느낌의 용어에 따뜻한 느낌의 모직으로 구현한 작품인데, 그의 재편집에 의해 익숙함은 낯섦으로 치환됐다.
두 번째 섹션에는 작품 ‘H1276’(2024)을 기준으로 캔버스 작업들을 소개한다. 전시장 출입구 부근의 기둥에 주목하고 그 상단에 스프레이 작업을 한 후 동일한 높이로 내부 전시장의 사면을 가로지르는 형광색 선을 그리고 그 선을 기준으로 상하단에 기하학적 도형, 숫자, 알파벳 등 그가 수집한 디자인 언어들을 추상적으로 재해석한 평면 작품들을 무질서하게 배열했다. 사물이 담고 있는 지시문이나 기능적 문구에 의외의 편집 과정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지체가 가미되며 디자인의 가독성을 해체하거나 전복한다.
일반적인 예술 작품 제작 과정과 비교하면 그의 작업 과정은 다소 급진적이다. 디자인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재료나 작업 방식에서 다양성을 추구한 탓이다. 작업마다 의미가 다르고, 그에 부합하는 재료와 작업방식을 찾는 것은 그에게 선결과제다. 대개는 어느 순간, 그가 일상에서 의미 있게 여겼던 것들이 기억 저장소에서 꺼내진다. 이런 태도 이면에는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작품에 진정성을 높이려는 작가의 의지가 스며있다.
다양한 작업 방식 중에는 새로운 시도들도 적지 않다. 능숙하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미술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큰 과제다. “능숙하지 않은 작업 방식이지만 기존의 미술사적 언어로는 착안하지 못했던 미학적 가치들의 논의를 가능케 한다면 과감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시는 6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