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날개 먹거리와 일자리] 가축만도 못한 노비의 삶…인간 존엄성, 바닥까지 무너지다
[미래의 날개 먹거리와 일자리] 가축만도 못한 노비의 삶…인간 존엄성, 바닥까지 무너지다
  • 김종현
  • 승인 2024.06.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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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수없이 바뀐 노비제도
노비개혁을 손바닥 뒤집듯
조선 태종 ‘노비종부법’ 실시
세종은 상반되는 ‘노비종모법’
성종때 ‘일천즉천노비법’ 실시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 명문화
노비, 씨가 마르다
“내 고달픈 삶 물려주지 않으리”
자손 낳기 거부·영아 살해도
인구 40% 노비였던 조선시대
조선의노비제도
저출산에 영향을 준 조선의 노비제도. 그림 이대영

◇세종 시절 인육을 먹은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람고기 즉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기록은 총 20건(국역본 3건, 한문본 17건)이 나온다. 최고 많이 나왔던 왕조는 세종(世宗) 때다. 5번이나 기록이 나온다. 명종(明宗), 선조(宣祖) 및 숙종(肅宗) 때 2건씩이고, 성종(成宗), 중종(中宗), 효종(孝宗), 현종(顯宗), 영조(英祖) 및 정조(正祖) 때 각 1건씩이다. 나라님께서 했던 일이란 대기근을 구제하기보다 인육을 먹었다는 사람에 강상죄(綱常罪)를 덮어씌웠다. 그리고 참형을 가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주고자 효수(梟首)했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이 헛소문이라도 왕조로서는 극한상황을 당면했기 때문이었다. 배부른 국왕들은 진실, 그런 것 따위는 알 필요가 없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나오는 인육사건 5건 가운데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있어 여기에 적는다. 세종 5(1423)년 11월17일 황해도 감사의 장계에서 “웅진에 사는 백정 양인길(梁仁吉)이 오랜 숙환으로 앓고 있었는데. 9살 난 아들 양귀진(梁貴珍)이 사람고기를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을 들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구워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잡수시고 곧 나았다(斷手指燒而食之, 其疾卽愈).”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었던 세종은 효행에 표창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세종 때 전염병 창궐에 대해 세종실록에서 ‘온역(溫疫)’을 검색하면 5번이 색출되는데 세종 6(1424)년 6월15일자와 6월16일자를 비롯해. 세종 14(1432)년 4월22일 등이다. 이때 서울 안(漢城府)에 급하지 않은 영선공사(營繕工事)를 정지시켰다. 세종 15년에는 백성들이 사는 어느 지역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제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저술해 처방전을 배포 했다. 세종 16년 5월27일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제생원(濟生院)의 각 1명씩 뽑아 각 도에 파견시켜 제약과 구료(救療)를 담당하도록 했다. 세종 19년 2월4일자 봄에 한성부(漢城府), 이태이원(利泰二院), 진제장(賑濟場)에 염병(溫疫)으로 죽은 사람들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밝히라고 명령했다.

◇‘모든 소가 다 웃을 일’이 생겨났다니?

세종 때에 백성들이 당면했던 극한상황을 살펴보면, i) 4군 6진(四郡六鎭)을 개척한다고 변방지역에는 끊임없는 정벌 전쟁을 했다. ii) 그렇게 빼앗은 땅에 사민정책(徙民政策)이란 미명으로 삼남지역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iii) 명나라 국경에 왜구들이 빈번히 출몰한다고 하자 명나라에 충정을 보이고자. 이종무(李從茂, 1360~ 1425)를 사령관으로 거제도 해류를 타고 대마도정벌이란 대리전쟁을 했다. iv) 밑도 끝도 없이 가뭄과 질병이 창궐하자 뒤늦게 ‘향약집성방’을 저술해 백성이 읽도록 했다. v) 태종은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으로 개혁한다고 뒤집어 놓았고, 아들 세종은 1432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 또 한번 뒤집었다. 빈대떡 뒤집듯이 조개모령(朝改暮令)한 결과 ‘모든 소가 웃을 일(All the cows will laugh)’을 낳았다. 고려말에는 말 3필에 노비 1명이 맞교환되었다. 세종 때는 말 1필에 노비 3명과 맞바꾸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되자 노비들은 자신들처럼 고달픈 삶을 자식들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일종의 노비 씨 말리기 운동에 들어갔다. 일반 백성들도 잦은 기근, 전쟁과 질병으로 사람고기까지 뜯어 먹어야 연명하는 세상에 자식을 절대 놓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자식 상팔자 세상이 되어갔다.

2021년 이영훈(1951년생)이 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세종은 노비종모법을 실시해 전 백성의 노비화로 노비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평가는 세종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과도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상천교훈(常賤敎訓)만을 강조하실 세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비들은 가축보다 대접을 못 받는 고달픔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영아를 죽이는 일을 자주 저질렀다. 세종은 노비종모법으로 자식들에게 노비의 질곡을 물려주지 않고자 인륜을 범하는 강상죄를 없애고자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노비제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고조선의 팔조법금(八條法禁)에서 나오듯이 ‘처벌노비(處罰奴婢, punishment slave)’가 있었다. 삼한시대 그리고 삼국시대는 대부분 전쟁노비(戰爭奴婢)었다. 신라 시대 성골은 노비를 3,00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통일신라 때 채무노비(債務奴婢)가 대부분이었다. 민정문서(民政文書)에선 4 촌락 422명 가운데 노비 가구는 25가구로 27% 정도였다. 고려시대는 노비의 소유권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따랐다. 신분제에서는 일천즉천법(一賤則賤法)을 준수했다. 태조 왕건 때 노비세전법(奴婢世傳法)이실시되었다. 광종 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정종 때 노비천자수모법(奴婢賤子隨母法)이 정착되었다. 고려 말 충렬왕 때 일천즉천법(一賤則賤法)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권문세족들은 많은 노비로 가세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 태종은 조세와 병역을 늘리고자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실시했다. 세종은 아버지와는 상반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 변경했다. 세조 때는 다시 노비종부법으로 회귀했다. 즉 양인의 남자와 천인 처첩 사이에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를 따르게 했다. 성종 때 와서 일천즉천노비법(一賤則賤奴婢法)으로 경국대전에 게재해서 아예 명문화했다. 이때도 세종 때처럼 소가 다 웃는 사태(situation where all the cows laugh)가 발생했다. 노비의 숫자가 증가해도 노비 자식은 낳지 않는다는 저출산 시대를 재차 소환시켰다.

영조 때는 다시 노비종모법으로 빈대떡처럼 뒤집었다. 따라서 노비의 숫자는 감소했다. 1861년 노비세습제(奴婢世襲제)를 폐지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됨으로써 노비제도도 사라졌다. 조선시대는 인구의 40%가 노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 500년을 대략 4개로 시대구분을 해 노비감소 추이를 살펴보면 : 1기에서는 37.1%에서, 2기 26.9%, 3기 5.9%까지 내려가서 4기에는 1.5%로 떨어져 사라졌다.

세종 때 노비제도 개혁이 저출산에 크게 영향을 끼친 요인에 대해 통시적 분석(diachronic analysis)을 한다면 : i) 왕씨(王氏)에서 이씨(李氏)로 국성(國姓)이 바뀌는 역성혁명 ▷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에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 뒤집히는 조개모령 ▷ 잦은 전쟁, 가뭄 홍수로 인한 기근에다가 질병으로 백성들이 죽어 나가떨어졌다. ii) 노비 혹은 일반 백성의 인간적 존엄성이란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iii) 노비이고 일반 백성이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지 ‘인생 나락에서 질곡의 연속’만을 절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아야 했다. 목숨까지 다 내려놓고 각성하게 했다.
 

 

글=김도상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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