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으로 읽는 세상] 아첨해서 출세한 자들, 영양 지날 때 고개를 숙여라
[맛과 멋으로 읽는 세상] 아첨해서 출세한 자들, 영양 지날 때 고개를 숙여라
  • 윤덕우
  • 승인 2024.06.0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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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의 고향 ‘영양’
조지훈의 생가(호은종택)
경북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조지훈의 생가(호은종택)는 언뜻봐도 칼날같은 지조와 위엄이 느껴진다.

 

 

영양은…
신라 때부터 현재 지명 사용
경북 최고봉 ‘일월산’ 위치
이중환 “인재 키우는데 적합”
무속인들은 ‘성산’으로 추앙

“아아, 일월산이여 그 기상 그 자태 바뀌고 다함이 없으라. 우리 영양과 더불어 길이 우뚝하라.”

경북 영양 출신 소설가 이문열이 일월산 일자봉 표지석에 남긴 일월송사의 한 부분이다. 일월산(1,219m)은 경북 최고봉으로 그 이름처럼 가장 먼저 해와 달을 볼 수 있기에 그 굳센 기상과 웅장한 기백은 우뚝 솟은 산세와 더불어 경외감을 준다.

그래서일까?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일월산을 ‘인재를 키우는 데 적합한 산수’라고 평했다. 일월산 지맥이 조금이라도 걸치면 명당이라는 말을 들음 직했고, 풍수지리를 아는 자들은 누구나 영양에 가보고 싶고, 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월산은 영적인 의미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어려 있고 강한 기운이 있다고 알려져 대한민국 무속인들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다. ‘소원을 비는 산’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미륵 동굴, 황씨부인당, 선녀암 등 유명한 기도처가 많은데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일월산 전체가 기도장소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월산의 기와 맥을 받은 영양이지만 강원도 양양과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고 단순히 영양을 경북 오지에 있는 곳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그 지역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와 폭넓은 배경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만 그 지역에 대한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단편적인 지식과 보이는 것만을 집착할 경우, 그 무지와 천박함에 사로잡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최근 영양을 방문한 모 유투버들의 경솔한 말과 행태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영양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가치와 정체성을 가졌는지 궁금해지는데 신라 때부터 현재의 지명인 ‘영양’으로 불리게 된 역사를 가진 만큼 유서가 깊다.

 

대표인물 4인
조선 정치인 조광조 후손 자리매김
벼슬 않고 학문만 연구한 정영방
시대·권력에 저항한 시인 조지훈

부친 월북에도 뚝심 지킨 이문열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사람들이 살만한 지역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인심(人心)을 손꼽았다. 그렇다면 인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오랫동안 형성되고 정립된 규범과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정체성이 진정한 의미의 ‘인심’이라면, 영양이라는 지역은 조광조, 정영방, 조지훈, 이문열 네 사람의 삶 속에서 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조광조(1482~1520년)이다. 조선 오백년 최고의 개혁 정치가이자 도학의 상징으로 국왕을 꾸짖었던 선비 조광조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부분을 살았기에 영양하고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조선 중종 때, ‘초고속 승진’으로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과 중종의 배신, 그리고 ‘주초위왕’ 모함으로 조광조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양 조씨 일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그 중 한 무리가 죽령을 넘어 일월산 쪽으로 오게 되고 호은 조전(趙佺)이 정착한 곳이 바로 영양 주실마을이다. 그 후 조전의 증손자인 조덕린은 그의 조상 조광조처럼 직언을 서슴지 않고 당쟁의 폐해와 서원 난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영조에게 올렸다가 유배되어 죽게 된다. 이렇게 조광조의 서슬 퍼런 선비정신과 지조는 한양 조씨 후손들을 통해 영양에 뿌리 내리게 된다.

두 번째, 정영방(1577~1650년)이다. 과거(진사시)에 합격하고도 광해군 시절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단념하게 된다. 스승 정경세가 벼슬길을 권하자 “저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한 번 벼슬에 나가면 학업과 명예를 모두 잃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며 고사했다. 그의 사상은 영양으로 이주 후, 조선 3대 민가 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 조성으로 구현되는데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한 삶을 지향했다. 인조반정 후 스승 정경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다시 뜻을 물었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고조부 정환(鄭渙)이 연산군에게 직언하다 갑자사화로 죽임을 당해서인지 그는 벼슬길을 선비의 길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정영방은 영양현이 폐현되었을 때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훗날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며 선비의 본분을 지키며 살았다. 이런 역사를 거치며 영양군은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226개 기초자치단체의 하나로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조지훈(1920~1968년)이다. 증조부 조승기는 의병대장으로 항일운동을 하다 한일합병 직후 자결했고, 창씨개명 반대를 주도한 조부 조인석은 6.25 전쟁 때 좌익 청년들이 모욕하고 난동을 부리자 그 수치감에 자살했고, 부친 조헌영(제헌 국회의원)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조지훈은 뼈 아픈 가정사를 꺾어야만 했다. 하지만 조지훈의 가문이 어떤 가문이었던가! 조광조의 칼날 같은 선비 기질을 간직한 채 그 유명한 ‘삼불차(三不借)’로 버티며 살아온 가문이 아니었던가! “첫째, 재불차(財不借)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남에게서 빌리지 말라. 둘째, 문불차(文不借)로 어떤 한 일이 있어도 남에게 글을 빌리지 말라. 셋째, 인불차(人不借)로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절대로 양자를 들이지 말라.” 이렇게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가풍 덕분인지 조지훈은 ‘승무’ 같은 우아하고 섬세한 시를 썼지만, 시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은 매섭게 한 대쪽같은 시인이었다. 부조리한 현실을 질타하고 모리배들과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태 앞에서 그는 ‘지조론’으로 세상을 정화하려고 했다.

네 번째, 이문열(1948~현재)이다. 영양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6.25전쟁 때 부친이 월북하여 가족들은 모진 연좌제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사 가는 곳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찰당하고, 이웃에게서 멸시를 당했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온갖 사회적 제약을 받으며 살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원망하지 않았다. 글로써 무자비한 권력과 폭력을 고발하는 동시에 소시민들을 위로하고 영웅의 귀환을 기대했던 시대를 표현했기에 대한민국은 이문열의 문장에 빚을 진 셈이다. 과거 우파들은 이문열을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했고 좌파들은 한때 그를 우파 체제의 수호자라고 비판했지만,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문열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뚝심을 지켰던 문인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지조의 고향 영양 출신답게 모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비굴하게 살다 죽었다는 말만큼은 정말 듣기 싫다. 그게 나의 마지막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영양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4명 모두, 본인 또는 가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연좌제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조를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은 많다. 패륜적 콘텐츠에 의지해 조회수로 연명하는 유튜버들, 능력 없이 감언이설로 컨설팅과 마케팅 시장에서 기생하는 ‘삼류업자들’, 진짜 예술인들을 욕 먹이는 ‘유사 예술인들’, 어설픈 실력으로 ‘문화’ 운운하며 밥벌이하는 일명 ‘문화 생계업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들은 본질을 숨겨버리고 거짓을 참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이러한 시대는 지조 있는 사람들도 살기 어렵지만, 지조 있는 지역들도 버티기 힘들다.

무능하고 지조 없이 아첨 잘하여 출세한 자들은 경북 영양군을 지날 때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라. 조광조는 아무리 고관이라도 자질이 부족한 자에게는 절대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그 꿋꿋함! 우리는 이것을 지조라고 부른다. 지조의 ‘DNA’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영양에 가보라! 지조의 ‘DNA’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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