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란 말도 성립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완벽함, 절대적 존재라는 말은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절대라는 전제 조건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는 관계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도, 내 마음에서도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最高善)을 행복이라 말했다. 하지만 칸트는 최고선과 최상선을 구분하며, 행복보다는 도덕적 이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마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완벽과 스피드를 중시여기는 의식이 팽배해진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최고선은 무엇일지에 대한 반문은 여전히 남는다. 비난받지 않을 정도의 보편적인 의식을 무의식중에 강요받는 21세기에 엉뚱한 질문이 될지 몰라도, 행복을 위하여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시대트렌드가 함의하는 이러한 내용과 당신의 마음은 무사히 공감이라는 감정선 위에서 조우(遭遇)하는지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가는 길을 멈추고, 오늘을 한번 돌아보자.
흔히 말하는 ‘많이, 빨리’라는 단어들의 정의와 그 느낌은 어떠한가? 책. 많이 빨리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사람도 많이 빨리 만나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이 만나는 사람과 빨리 읽은 책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의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많이 보는 것은 안 보는 것보다는 좋다. 하지만 많이 빨리 보는 것들의 단점은 그만큼 빨리 잊혀진다는 사실과 중요한 점을 쉽게 지나칠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책을 수백 권 읽었다, 내 핸드폰에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이런 말들이 과연 그들의 행복을 대변할지는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는 볼 때마다 자랑 일색이다. 내가 누구를 만났다고, 누구를 안다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을 때면 몇 달 만에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마저 든다. 그리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본인의 SNS에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린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이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지 몰라도, 어느 정도 그를 아는 이들이 보면 다른 생각이 들 것 같다. “한두 번 보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과연 그 만남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말이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그를 향한 안쓰러움까지 든다. 그 친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PR 시대라 영업적으로 활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진정성 있는 사람을 더 원하고 있다. TV에서 조명된 식당이라도 주인장의 진정성이 없으면 그리 오래 성장하지 못한다. ‘첫인상은 배신한다’라는 책 제목도 있듯, 사람 역시 48시간 이상 끓인 육수만으로 손님을 맞는다는 뚝심 있는 주인장처럼 오래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람은 많이 겪어보고 만나보아야 그의 본심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조금 더 빨리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바로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본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본능보다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성은 교육으로 다듬어질 수 있다. 조금 더 느려도 괜찮다는 식의 마음 자세가 필요한 시대이다. 아니 조금 더 느려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그러하다.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만 현란하게 포장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복귀, 인문 르네상스를 주창하는 학자들과 작가들이 있다. AI 시대 아날로그적 발상이라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제에 맞는 질문만 잘 하면 순식간의 시인보다 더 그럴듯한 시(詩)가 나오는 시대, 그들이 설 곳은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것을 학문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배우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세상의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완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뿐이다. 완벽과 빠름을 너무 좋아하지 않았으면 한다. 성장은 항상 느림 속에 있었고, 그 느림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독백이 성장의 자양분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最高善)을 행복이라 말했다. 하지만 칸트는 최고선과 최상선을 구분하며, 행복보다는 도덕적 이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마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완벽과 스피드를 중시여기는 의식이 팽배해진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최고선은 무엇일지에 대한 반문은 여전히 남는다. 비난받지 않을 정도의 보편적인 의식을 무의식중에 강요받는 21세기에 엉뚱한 질문이 될지 몰라도, 행복을 위하여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시대트렌드가 함의하는 이러한 내용과 당신의 마음은 무사히 공감이라는 감정선 위에서 조우(遭遇)하는지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가는 길을 멈추고, 오늘을 한번 돌아보자.
흔히 말하는 ‘많이, 빨리’라는 단어들의 정의와 그 느낌은 어떠한가? 책. 많이 빨리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사람도 많이 빨리 만나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이 만나는 사람과 빨리 읽은 책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의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많이 보는 것은 안 보는 것보다는 좋다. 하지만 많이 빨리 보는 것들의 단점은 그만큼 빨리 잊혀진다는 사실과 중요한 점을 쉽게 지나칠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책을 수백 권 읽었다, 내 핸드폰에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이런 말들이 과연 그들의 행복을 대변할지는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는 볼 때마다 자랑 일색이다. 내가 누구를 만났다고, 누구를 안다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을 때면 몇 달 만에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마저 든다. 그리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본인의 SNS에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린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이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지 몰라도, 어느 정도 그를 아는 이들이 보면 다른 생각이 들 것 같다. “한두 번 보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과연 그 만남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말이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그를 향한 안쓰러움까지 든다. 그 친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PR 시대라 영업적으로 활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진정성 있는 사람을 더 원하고 있다. TV에서 조명된 식당이라도 주인장의 진정성이 없으면 그리 오래 성장하지 못한다. ‘첫인상은 배신한다’라는 책 제목도 있듯, 사람 역시 48시간 이상 끓인 육수만으로 손님을 맞는다는 뚝심 있는 주인장처럼 오래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람은 많이 겪어보고 만나보아야 그의 본심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조금 더 빨리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바로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본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본능보다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성은 교육으로 다듬어질 수 있다. 조금 더 느려도 괜찮다는 식의 마음 자세가 필요한 시대이다. 아니 조금 더 느려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그러하다.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만 현란하게 포장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복귀, 인문 르네상스를 주창하는 학자들과 작가들이 있다. AI 시대 아날로그적 발상이라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제에 맞는 질문만 잘 하면 순식간의 시인보다 더 그럴듯한 시(詩)가 나오는 시대, 그들이 설 곳은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것을 학문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배우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세상의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완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뿐이다. 완벽과 빠름을 너무 좋아하지 않았으면 한다. 성장은 항상 느림 속에 있었고, 그 느림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독백이 성장의 자양분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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