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망국의 길 걸은 고종 삶의 궤적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망국의 길 걸은 고종 삶의 궤적
  • 승인 2024.07.0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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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고종이 집권한 1863년부터 조선이 망한 1910년까지의 48년간의 역사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활동했으나 결국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서 1392년 건국된 조선왕조는 519년의 역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고종의 집권기 초기 10년간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집권기(1863∼1873)로 마지막 순종의 집권기(1907∼1910)를 제외하고 35년간은 오롯이 고종의 의지가 작동하던 시기였다. 제26대(재위:1863~1907) 왕인 고종은 1852년 9월8일 오후 2시경에 태어나 1919년 1월21일 오전6시경에 향년66세로 붕어했다. 1864년 1월21일 즉위한지 55년째였다.

 

이 명조는 ①유금(酉金)의 ②계수(癸水)일간으로 편인(偏印)격국용신(格局用神)이다, 그러나 백로가 지난지 하루 만에 태어나 신금(申金)의 경금(庚金)이 정인(正印)사령하여 전통을 계승하고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는다는 정인(正印)의 명령을 받아서 철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했다. 고종은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으로, 효종(인평대군의 형)의 후손들로 이어진 왕실 직계와는 정말 너무나도 멀고 먼 철종과 17촌의 방계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철종과 7촌의 가까운 직계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결국 고종은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서 순조의 아들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적장자이자 이준용(1870∼1917)의 부친인 동복형인 이재면(1845∼1912)과 이복형인 이재선(1842~1881), 흥선군의 형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의 자식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

 

①유금(酉金)의 ②계수(癸水)일간은 금백수청(金白水淸)으로 신금을 취하고 병화의 정재로 보좌하면 수난금온(水暖金溫)으로 신금(辛金)과 병화(丙火)가 투출하여 재성과 인성이 방해되지 않는 재인불애(財印不碍)가 되면 과거에 급재해 공명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명조는 병화와 신금이 투출하지 않은 미투출 편인격에 기토의 편관(偏官)이 쌍투한 중살(重殺)사주로 권력의지는 강하나 현실적인 활동력과 부하복을 나타내는 목기(木氣)의 식신과 상관이 없고, 현실적김 감각과 결과물을 만드는 병화(丙火)의 재성(財星)도 부족한 것이 흠으로 진정한 자기세력은 없고 권력의지만 강한 인물이 되어 삶자체가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종 재위기인 45년은 나라를 중흥시킬 충분한 시기였으나 그는 정무적인 감각이 부족했다. 외척인 민씨 척족 일파의 부패를 사실상 방조, 방관하거나 조장했다. 또한 1882년의 임오군란이나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을 외세인 청군을 불려와서 외세개입을 방조했다. 이것이 청일전쟁과 1896년의 아관파천으로 이어져 각종이권을 외국이 챙기도록 방조했다. 또한 이용익, 김가진(1846∼1922), 민영환.김홍집(1842∼1896) 정도를 제외하면 민겸호, 민영휘, 민영철,김홍륙,조병갑,이용태,이완용 등의 애국심은 커녕 심지어 고종 자신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외세에 아부하기만 급급했기에 대부분 친청파, 친러파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급기야 러일전쟁 후 대부분 친일파로 재변절하여 대한제국 멸망에 크게 기여했다. 용인술(用人術)이 부족한 결과물이다.

편인격의 격국용신의 선장격인 상신(相神)은 정관이나 편관이거나 식신과 상신 및 재성이 된다. 이 명조는 유금의 인성도 강하고 일간 ②계수(癸水) 역시 임자년(壬子年)으로 왕(旺)하므로 인성격이 성격(成格)되었다. 소위 편인용칠살격(偏印用七殺格)이다. 이와 같이 인중용살(印重用殺)하고 살인상생(殺印相生)하는 사주는 인품이 인내력과 어질고 친화력이 좋고 식견이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사주의 년주에 있는 임자(壬子)의 겁재(劫財)는 부친과 아내 및 고정재물을 파과히는 십성으로 그는 부친과 불화하여 끝내 화해하지 못했고 부인인 명성왕후는 1895년의 을미사변으로 사별하고 말았고 현실적인 재정문제도 방만하게 처신하여 결국 1907년 민간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준, 이성설, 이위종을 밀사를 파견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 · 송병준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때 고종이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동포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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